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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렉시오 디비나

마태복음 25:14-25 / 예수의 꿈 유다의 몽상

신의피리 2024. 4. 15. 08:02
마태복음 25:14-25

14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가룟 사람 유다라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15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예수를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여러분은 내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그들은 유다에게 은돈 서른 닢을 셈하여 주었다. 16 그 때부터 유다는 예수를 넘겨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7 무교절 첫째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우리가,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려고 하는데, 어디에다 하기를 바라십니까?"
18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성 안으로 아무를 찾아가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때가 가까워졌으니, 내가 그대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겠다고 하십니다' 하고 그에게 말하여라." 19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께서 그들에게 분부하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다.
20 저녁때가 되어서,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아 계셨다. 21 그들이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넘겨줄 것이다."
22 그들은 몹시 걱정이 되어, 저마다 "주님,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였다.
23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이 대접에 손을 담근 사람이, 나를 넘겨줄 것이다. 24 인자는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떠나가지만, 인자를 넘겨주는 그 사람은 화가 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기에게 좋았을 것이다."
25 예수를 넘겨줄 사람인 유다가 말하기를 "선생님, 나는 아니지요?" 하니, 예수께서 그에게 "네가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

 

최후의 만찬, 해방의 기쁨을 만끽해야 할 시간이다. 오래전 이집트 바로의 노예였던 이스라엘은 모세의 지도하에 기적같이 출애굽을 했다. 기적이었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다. 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모세 때처럼 지금도 그 일을 행하실 것이다. 그 믿음은 기쁨과 기대, 기도를 낳는다. 유월절 식사는 그런 자리다. 어쩌면 제자들은 또 다른 출애굽이 시작될 수 있다고 믿는 설렘을 가졌을 수도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산통을 깨신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넘겨줄 것이다."

 

배신자가 있다는 말인가! 저마다 걱정이 앞선다. 

 

"주님, 나는 아니지요?"

 

예수께서 그 배신자에게 경고하신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건 심판일까? 여전히 사랑일까? 배신자에게 속히 가서 배신행위를 하라는 말일까? 아니면 그만두라는 말일까? 사랑으로 충만한 분이시라면 아마도 음모를 꾸미고 있던 유다의 배신을 경고하는 말이어야 한다. 그러면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누군가는 배신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것이 정해진 일이라면, 어떤 루트를 통해서라도 그 일은 일어났을 것이다. 

 

그때, 유다도 한마디 한다. 

 

"선생님, 나는 아니지요?"

 

유다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주님'이라 불렀다. 'Lord / 큐리에!' 그러나 유다는 '선생님'이라 부른다. '랍비' 이 두 호칭은 차이가 있는 것일까? 지금 내가 사전과 주석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님이라고도 불렸고, 선생님이라고도 불렸다. 어쩌면 아무 차이도 없을 것이다. 혹시 저자는 일부러 호칭의 차이를 두었을까? 

 

'나는 아니지요?' 자신이 바로 예수께서 지목하고 있는 그 배신자이면서 유다는 뻔뻔하게 거짓말을 한다. 은밀히 대제사장들을 만나 스승을 은 30 받고 넘기려 한 자신의 계략이 발각되는 순간이다. 유다는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변명하고 싶었던 것일까? 모면하고 싶었던 것일까?

 

유다가 왜 예수님을 팔아넘기려고 했는지  그 이유는 다른 본문에서 다룰 것이다. 스승에게서 자신의 꿈을 보았고 그래서 따랐겠지만,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련의 일들을 통해 그는 예수께서 강경 투쟁과 전복, 아니면 모세와 같은 기적을 이루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에 분개했을 수도 있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신도의 공동생활>에서 한 저 불멸의 명문이 연상된다.

"기독교 공동체 속으로 함께 가지고 들어온 인간적인 이상은 참된 공동체를 방해하므로 반드시 깨어져야 하며, 그럴 때 비로소 참된 공동체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의 꿈을 기독교 공동체 자체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아무리 정직하고 진실하며 헌신적인 사람이라 해도, 결국 모든 기독교 공동체의 파괴자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몽상을 미워하십니다. 왜냐하면, 몽상은 사람을 교만하고 거만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어떤 공동체상을 꿈꾸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그 꿈을 이루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는 요구하는 자로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서, 자기 자신의 법을 만들어서는 그 법에 따라 형제들과 하나님을 심판합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의 꿈이 아니라 자신의 꿈을 사랑한 사람이었을까? 그는 자신의 꿈을 요구하다 좌절되어 분노하고 배신하는 자가 되었던 것일까? 그것이 적발되자 적반하장 식으로 '선생님, 나는 아니지요?'하며 뻔뻔해진 것일까?

 

예수께서는 넘겨지는 길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신다. 늑대들의 소굴인 줄 알면서 가신다. 그랬다가는 모든 꿈이 수포로 돌어갈지도 모를 패배의 길로 들어가신다. 그래야 산다고 하신다. 죽으면 살게 된다 하신다. 도피하지 않으신다. 다른 길을 도모 하지 않으신다. 주님께서 가신 그 길이 주님의 비전이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이들의 비전이기도 하다. 나는 알고 있을까? 아직도 내 몽상에 빠져 있는 것일까? 그래서 자주 쓰라린 것일까? 단호한 긍정의 문장이 써지지 않는다. 의문문만 쏟아져 나온다. 

 

주님, 저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너무 자주 세상 속에서, 교회 사역 속에서, 여러 순간, 그리스도인의 고난의 길을 회피하고 싶어 주님을 돈 받고 넘기는 건 아닌지 두렵습니다. 부름 받은 이 제자의 길, 유월절 공포의 밤에 이르거든 삼 일 후 부활의 새벽이 있음을 기억하며 인내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