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바람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렉시오 디비나

마태복음 18:21-35 / 용서의 근거

신의피리 2024. 3. 14. 06:00
마태복음 18:21-35

21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주님, 내 형제가 나에게 자꾸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
22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마치 자기 종들과 셈을 가리려고 하는 어떤 왕과 같다. 24 왕이 셈을 가리기 시작하니, 만 달란트 빚진 종 하나가 왕 앞에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는 빚을 갚을 돈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그 아내와 자녀들과 그 밖에 그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랬더니 종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참아 주십시오. 다 갚겠습니다' 하고 애원하였다. 27 주인은 그 종을 가엾게 여겨서, 그를 놓아주고, 빚을 없애 주었다.
28 그러나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나자, 붙들어서 멱살을 잡고 말하기를 '내게 빚진 것을 갚아라' 하였다. 29 그 동료는 엎드려 간청하였다.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 하지 않고, 가서 그 동료를 감옥에 집어넣고, 빚진 돈을 갚을 때까지 갇혀 있게 하였다. 31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딱하게 여겨서, 가서 주인에게 그 일을 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다 놓고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애원하기에, 나는 너에게 그 빚을 다 없애 주었다.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니냐?' 34 주인이 노하여, 그를 형무소 관리에게 넘겨주고,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가두어 두게 하였다.
35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자기 형제자매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

 

 "주님, 내 형제가 나에게 자꾸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

 

베드로는 최대한 아량을 베풀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치를 말했다. 7번 용서하면 성인군자감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70번 곱하기 7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대답하셨다. 어떻게? 도대체 왜?

 

왕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불쌍히 여겨 탕감해 준다. 

은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이다.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다. 1데나리온을 오늘날 우리 화폐로 10만원이라고 가정하면, 1달란트는 6억이고, 1만달란트는 6조다. 그러니까 헤아릴 수 없을만큼 엄청나게 많은 돈이라는 뜻이겠다. 그런 사람이 탕감을 받았다? 아무튼 그렇다고 한다. 큰 나라의 왕이 작은 속국의 빚을 탕감해 주었다고 치자. 

 

그런데 얼마후 그 엄청난 행운의 사나이가 자신에게 100데나리온(천만원) 빚진 자를 빚 갚지 않는다고 감옥에 처넣었다는 소문이 들린다. 왕이 그를 다시 소환한다. 왕이 따져묻는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애원하기에, 나는 너에게 그 빚을 다 없애 주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지은 사람들, 우리에게 상처 준 사람들을 용서할 근거는 우리가 하늘 하나님으로부터 다 갚을 수 없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용서해 주신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은혜를 입은 자로써 마땅히 우리에게 죄를 지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용서해 주어야 한다. 당연한 이치다. 받은 용서는 주는 용서로 나타나야 한다. 

 

우리에게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우리가 용서하기 어려운 이유는 받은 은혜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헤아려보지 못한 것이다. 나를 용서하신 그 은혜를 값싼 은혜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은혜를 이용하는 것이다. 은혜를 주시는 분을 모르는 일이요 그분을 욕되게 하는 일이다. 용서하는 일은 엄청난 손해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하기 어렵다. 왜 나만 용서하는가, 왜 나만 손해보는가, 왜 나는 여전히 상처받아야 하는가, 상대적 계산이 우리를 용서하기 힘들게 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자.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갚을 수 없는 은혜와 용서를 입었는가? 그 사실을 믿는가? 그 은혜가 나를 살게 하는가? 나는 더이상 죄로 인한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사는가? 그 자유와 기쁨이 형제자매를 향하여 긍휼과 용서로 나타나는가? 서로서로 용서와 화해를 하도록 가교역할을 하고 있는가? 

 

주님, 내 성품과 인격의 용량만으로는 내게 상처 준 이들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영이 내게 임하시고, 주님의 다함없는 은혜와 용서가 오늘도 나를 살게 함을 내가 깨닫는다면
그 힘에 의지하여 용서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적일 것입니다.
이 압도적 힘에 포섭된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