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이승우가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브라함 일가에 대해서 5편의 연작 소설을 썼다. 오래 전에 읽었고, 이번에 독서모임 때문에 다시 읽었다. 각 편마다 최소 한 가지씩은 건져올리겠다는 생각으로 소설을 읽었다. 마치 본문의 핵심 주제를 건져올리는 심정으로 말이다. 성경 이야기의 변주와 같은 소설인데다가 소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해석처럼 여겨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설은 대체로 전통적 해석의 흐름을 이어간다. 디테일은 상상력으로 채워넣었다.
소돔의 하룻밤
롯은 왜 꾸물거리는가. 그는 무엇 때문에 망설이는가. 그가 살고 있는 도시가 멸망할 거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그렇게 된다 해도 슬퍼하지 않을 만큼 그 도시가 타락했다고 생각했으므로 놀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은 그가 수십 년 동안 살아온 땅이었다. 비록 성안의 주민들로부터 제대로 된 거주자 취급을 받지 못하고 차별당한 일이 많았지만, 그래도 삼촌과 함께 고향을 떠나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던 그가 스스로 결정하고 정착한 곳이었다. 따르던 삼촌을 기꺼이 떠나게 한 황홀한 땅이었다. 젊은 그의 혼을 빼놓았던 이집트의 도시를 연상시키는 소돔을 그는 스스로 선택했고 그 도시가 주는 풍요로움과 화려함과 자유로움을 즐겼다. 악덕과 문란함과 차별은 그 도시의 풍요로움과 화려함과 자유로움의 뒤편에 있는 그늘이었다. 그늘에도 불구하고 도시가 내뿜는 매혹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는 그 그늘까지도 매혹의 요소에 더해졌다. 그것이 그가 소돔을 떠나지 않은 이유였다. 그는 대부분의 도시인들과는 달리 소돔의 풍요로움과 화려함과 자유로움의 뒤에 있는 악덕과 문란함과 차별을 구별해 낼 줄 알았지만, 그러나 그 역시 그 공기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들이마시는 공기는 그의 일부가 되었다. 도시는 그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는 도시가 제공하는 것들을 받아들였다. 그는 도시인이었다. 그는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이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도시가 무조건 사람을 나쁘게 만든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는 소돔을 싫어했고 또 사랑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소돔 사람들을 싫어했고 소돔 도시를 사랑했다. 그는 소돔 사람들(의 악덕과 문란함과 차별)의 멸망에 대해서는 놀라지도 않고 아쉬워하지도 않았지만, 소돔 도시(의 풍요로움과 화려함과 자유로움)가 사라진다는 것에 대해서는 놀라고 아쉬워했다. 그 도시가 곧 사라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힘들었다. 머리는 이해했지만 몸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곳을 쉽게 떠나지 못했다. 곧 없어질 도시를 조금이라도 더 보고 더 갖고 싶었다. 그 도시를 떠나지 않는 것이 그가 그 도시를 유지시키는 방법이었다. 그는 꾸물거리면서 곧 사라질 도시에서의 시간을 자꾸만 연장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산으로 도망가야 한다는 천사들에게 산이 아니라 가까이 보이는 작은 성으로 피신하게 해달라고 청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도시가 주는 즐거움에 길든 자이다. 도시인이다. (47-48pp)
롯의 기이한 행동을 이승우는 예리하게 파고든다. 롯이 두 손님을 강제로 집에 머물게 하고, 난봉꾼들이 집으로 쳐들어올 때 두 딸을 내어주려고 하며, 두 천사가 소돔의 심판에 따라 산으로 피신하라고 할 때 머뭇거리고 주저한 이유가 밝혀진다. 그는 도시가 주는 풍요로움과 화려함과 자유로움을 사랑했다. 그 도시에서 문란하게 사는 탐욕스러운 사람들을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도시의 삶을 동경했다. 끝내 그 동경을 내려놓지 못한 자의 파국을 보여준다.
오늘 도시에서, 도시적 삶에 익숙해진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닌가.
하갈의 노래
마지막 4 단락은 절정이다. 지극히 평범한 여종의 삶을 살았던 하갈이 여주인 사라의 권유로 아브라함에게로 들어가 아들을 낳고, 또다시 여주인 사라의 질투와 시기로 내쫓김을 당한다. 그럴 때마다 아브라함의 침묵은 비굴하게 느껴지고, 사라의 히스테리컬한 반응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그렇게 내쫓김을 당할 때마다 주인의 하나님이 나타나서 말을 걸고 살핌과 보호를 약속한다. 하갈은 아들과 함께 광야로 쫓겨난다. 갈증과 더위로 점점 기력이 떨어진다. 아들을 지켜줄 수 없는 처지에 놓인 하갈은 진작 자신을 도우셨던 주인의 신을 향해 탄식한다. 88페이지부터 시작되는 하갈의 탄식은 어려서부터 착하게 살아온 한 중년의 남성 독자의 심정을 끌고 간다. 하갈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동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쳐 쓰러지는 중에 하갈은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외친다.
그녀는 자기가 울분을 쏟아내야 할 대상을 정확히 지목했다. 그 집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내내 침묵했던 분. 땅의 신음소리가 하늘에서는 가장 큰 소리라고 했던 말을 떠올리며, 외롭고 슬픕니다, 내 부르짖음을 들어주십시오, 하고 하소연할 때도 묵묵부답이었던 분. 빈 들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는데도 모습을 보이지 않고 목소리도 들려주지 않는 분, 그분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원망은 사람에게서 그녀가 한때 살피시는 분이라고 호명했던 신에게로 옮겨갔다.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당신은 옳지 않습니다. 그녀는 땅에 주저않은 채 하늘을 보고 외쳤다. 그때 왜 내 앞에 나타나셨나요? 그때 왜 내게 약속의 말을 하고 힘들게 떠나왔던 집으로 돌아가게 했어요? 이렇게 하려고요? 이렇게 아무도 모르게 죽게 하려고요? 이것이 당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좋습니다. 나는 여기서 죽겠습니다. 이것이 당신의 뜻이라며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내 아들은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그녀는 호소했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늘은 멀쩡하게 파랗고 땅은 죽은 듯 고요했다. 바람도 불지 않았다. 내 아들이 나와 함께 죽어야 합니까? 그러면 당신의 그 약속, 바위처럼 단단하고 하늘처럼 영원한 그 약속은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주인의 집으로 나를 돌려보내려는 속임수에 지나지 않았습니까? 그녀의 부르짖음은 공허한 메이리가 되어 돌아왔다. 하늘과 땅이 합세하여 옳지 않다는 그녀의 항의가 옳지 않다고 나무라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지쳤다. 울음도 말라 나오지 않았다. (88-90.pp)
이 부분을 읽다가, 소설 엔도 슈사코의 <침묵>의 절정 부분이 떠올랐다. 고난당하는 신부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한 말씀'이었다. 그 극단의 상황으로 서서로 죄어가는 묘사와 겹쳐 보였다. 하갈은 억울한 고난에 내몰렸다. 죽음의 공포가 온 영혼을 덮쳤다. 그 상황에서 그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한 말씀의 개입이다. 그러기까지 그 몸부림치는 여인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사랑이 한 일
그것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라고 아버지는 나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 일에 대해 아버지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면 말하지 않는 것이 일어난 그 일을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믿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마다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침묵을 택했고 그 시간은 봉인되었다. 그것은 그것이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나에게 말해준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런 사람이 있기나 했을까? 그런 사람이 없었다면 나는 누구에게 그 말을 들었을까? 듣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그것이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일까? 그 말은 나의 말이었을까? 내가 아버지의 입이 되어 아들인 나에게 말한 것일까? 아버지 대신 내가 나에게 말한 것일까? 내가 한 말을 내가 들은 것일까? 나는 나에게 왜 그 말을 한 것일까? 그것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라고 아버지가 말하는 것을 내 귀가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것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라고 아버지의 입이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래서 아버지의 입이 되었던 것일까? (97-99.pp)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바쳐라" 신은 아버지의 '사랑하는' 외아들인 나를 원하셨지요.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런 요구를 하는 신이 어디 있겠어요. 사랑 때문이 아니라면 신이 왜 그러겠어요?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고 지나치게 사랑한 것이 사실인 것처럼 그분이 아버지를 사랑하고 지나치게 사랑한 것도 사실이라는 걸 나는 알 것 같아요. (102p)
참으로 기묘한 문체다. 이 글은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매번 시작하는 문장은 똑같고,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라고 아버지는 나에게 말하지 않았다.' 이 글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이삭의 고백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는 에피소드에서 아브라함의 갈등에 초첨을 맞추었고, 그의 위대한 순종이 믿음의 최고봉인 것처럼 해석해 왔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아들 이삭의 입장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삭은 과연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하나님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요구한 것은 사랑 때문인가?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신을 제물로 바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었는가? 아버지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사랑하지 아니하였나? 독생자를 아낌없이 사랑했건만, 그렇다면 아들을 향한 사랑보다 신을 향한 사랑이 더 큰 것이었는가? 그렇다 한다면 신의 사랑은 어찌 이리도 잔인한 것일까? 아들 이삭의 입장에서 말이다. 아니 실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랑은 실로 무섭다.
이승우 작가는 이삭의 입장에서 이 일을 재해석하고 있다. 이는 '사랑이 한 일'이다. 그러나 정작 자신에게 그 사랑이 사랑으로 와 닿았을까? 여기서부터는 성경을 넘어선다. 성경은 그 사실을 말하지 않고, 소설이 시작된다. 사랑이 한 일이 이삭에겐 트라우마로 남는다. 그렇지 않겠는가? 사랑이라 해석했으나, 사랑받았다고 여기고 싶었으나, 그 사랑은 불가해한 무서운 사랑일 수 있지 않겠는가?
허기와 탐식
탐식가의 특징은 좋아하는 음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음식이 아니어도 먹는다는 것이다. 거의 항상 배가 고프지만 배가 고프지 않을 때에도 거의 항상 먹을 것이 필요하다는 것 역시 탐식가를 타인과 구별하는 요소이다. 위장의 요구는 절실해서 좀처럼 피하기 어렵지만 위장을 향한 요구 또한 만만치 않다. 아니, 후자의 요구가 더 압도적이다. 위장이 요구해서 먹기도 하지만 위장을 재촉해서 먹기도 한다는 뜻이다. 위장이 꽉 차 있는 상태에서도 음식 공급에 대한 욕망이 생기는 것 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이것은 위장의 필요와 무관하다. 음식물로 위장이 가득 차 있는데도 허전하고 공허하다면 이것은 누구의, 무엇의 필요인가. 위장에 빈 공간이 없는데도 여전히 음식을 갈구한다면 이 갈구는 어떤 공간을 채우 위한 갈구인가. 위장은 꽉 찼는데 어디가 비어 있어서 어디를 채우려고 음식을 탐하는가. 탐식하는 자는 대답하지 못한다. 모르기 때문이다. 어디가 비어 있는지 안다면 그곳을 채울 것이다. 그러나 어디가 비어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어디가 비어 있는지 모르지만 어딘가 비어 있는 것은 확실하기 때문에 음식을 찾고 부르고 음식에 손을 대고 이미 꽉 차 있는 위장 속으로 집어넣는다.(136-137pp)
앞 장 '사랑이 한 일'의 마지막 부분과 '허기와 탐식'의 앞부분은 소설이다. 성경을 재해석한 것이 아니라, 성경 본문에 전혀 없는 부분을 소설가가 자신의 해석과 상상력으로 꽉 채웠다. 다른 부분들은 대개 하나의 해석과 주석처럼 여겨졌다. 신선하기도 했으나 대개의 결론은 전통적 해석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부분은 신선하고 흥미진진하다. 개연성이 있다. 특히 이삭이라는 인물의 노년의 이상한 행동을 기가 막히게 채워넣었다. 나는 이승우의 해석 편에 서고 싶을 정도다. '탐식의 문제를 영적 차원으로 해석한 부분도 압권이다. 이삭이 제단에 바쳐진 후, 홀로 남았고, 그는 그 이후 이스마엘을 찾았고, 이스마엘이 마련해 준 음식에서 위로를 얻었다. 그것이 그의 트라우마가 되었고 위로가 되었으며, 이후 이스마엘과 유사한 큰 아들 에서와 에서가 사냥해서 가져온 음식을 좋아한 이유가 된다. 허기와 탐식이 낳은 비극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사랑이 한 일이란 말인가?
야곱의 사다리
야곱은 자기가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천사들이 사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는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넋이 빠져 있는데 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야곱아!" 목소리는 그의 위에서 앞에서 뒤에서 옆에서 들렸다. 그는 그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이 위인지 앞인지 뒤인지 옆인지 분간하지 못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분명해서 부정할 수 없었다. 그의 이름이 구체적인 형상인 양허 공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누구십니까?" 그는 두리번거리며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그의 위에 앞에 뒤에 옆에 있었다. 그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있는 곳이 위인지 앞인지 뒤인지 옆인지 판단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의 주인은 실재했다. 그는 위에 있었고 앞에 있었고 뒤에 있었고 옆에 있었다. 아주 가까이 있었고 아주 멀리 있었고,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리는 천사들 가운데 있었고, 그 위에 앞에 뒤에 옆에 있었다. 그의 존재는 세상에 편만했다. 그 역시 야곱이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 역시 야곱이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꿈에서도 바란 적 없는 일이었다. (199-200pp)
야곱은 그곳에서 여호와를 만날 줄 몰랐다. 그분이 그곳에 계시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여호와가 그곳 에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가 몰랐을 때도 그분이 그곳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알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곳에 계시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그가 알기 전부터, 아니, 그의 앎(모름)과 상관없이 그분은 그곳에 계셨다. 그곳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도 계셨다. 그의 앎(모름)과 상관없이 그 곳에도 계시고 다른 곳에도 계셨다. 천지가 그분의 거처라는 걸 이제 그는 안다. 어디에나 계셨고 계시고 계실 거라는 걸 안다. 그리고 또 그는 안다. 그분은 어디에나 계시지만 자신을 드러내겠다고 결정할 때까지는 스스로를 숨긴다는 것을. 그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오직 그분이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로 결심할 때뿐이라는 것을. 그분이 계시는 걸 알지 못하는 것은 그분이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로 결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감추는 것을 그분이 스스로, 어떤 작용이나 누군가의 개입 없이 결정한다는 것을. 사람은 그분이 스스로 자신을 드러낼 때, 드러내기로 결심할 때만 거기 그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겨우 인식하게 된다는 것을. 누구도 그분에게 나타나라고, 모습을 보이라고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군가 그의 머릿속에 집어넣어 준 것처럼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깨달아졌다. 그러자 두려움이 엄습했다. 야곱은 두려운 가운데서 떨리는 목소리로 깨달은 것을 털어놓았다. "이곳이 바로 여호와의 집이고 하늘의 문이 아닌가!" (208-209.pp)
아브라함 일가의 여러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조금 이상하다.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아브라함 주변 인물들에게는 낯선 신이다. 롯, 하갈, 이삭, 에서, 그리고 야곱에게까지. 야곱은 형 에서의 살의를 느끼고 하란으로 도망친다. 벧엘에서 그는 꿈에 등장한 하나님을 만난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지, 자신 야곱의 하나님은 아직 아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음성으로 나타나셨다. 그런데 그분의 존재는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앞에 옆에 뒤에 위에 계신다. 계시는 그곳으로부터 음성이 들린다. 이승우가 묘사한 하나님은, 비로소 야곱에 와서야 하나님 답다.
이승우의 연작 소설은 소설인지 아니면 소설을 빙자한 창세기 해설인지 헷갈린다. 그는 번역이라고 했다. 그럴 수도 있다. 원작이 살아 있는 것을 재구성하는 일은 위험하다. 그 주제를 그대로 살려내되, 디테일은 상상력으로 채워넣었다. 제단 위에서 죽다 살아난 이삭이 이스마엘을 만나러 간 것과 그가 평생 허기와 식탐으로 시달렸다는 것은 완전한 소설이지만, 좋았다. 소설다운 부분이 가장 이색적이고 개연성이 있다.
나도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