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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시니어매일성경

고통으로 가장한 은혜

신의피리 2025. 11. 16. 08:01

시니어매일성경 26년 1-2월호 / 일상이 선물이다 7


고통으로 가장한 은혜

김종필
 
 

 

고통이 널려 있다

 
어깨 통증으로 병원 치료를 받고 있다. 세 번 병원을 옮겼지만 약간 나아졌을 뿐 완전히 낫지는 않는다. 치료비를 생각하면 우울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려움 증상도 생겼다. 연고를 바르고 약을 먹으면 가라앉지만, 신경 쓸 일이 생기면 다시 피부 트러블이 올라온다. 아픈 어깨로 가려운 부위를 긁고 있자니 짜증이 치민다. 이런 와중에 전립선 비대증 진단까지 받았다. 식사 후 세 종류의 약과 영양제를 한 움큼씩 삼키다 보면 내 처지가 처량하기 그지없다. 이제 청년의 시절은 완전히 지났고, 중년 이후의 계절이 도래했음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그나마 큰 병이 아니라 다행이다. 내 또래 사람들 중에는 당뇨와 고혈압으로 약을 먹는 이들이 있다. 어떤 이는 췌장이나 대장에 생긴 혹을 두려움 속에서 관리하고, 어떤 이는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재활 중이다. 허리 디스크로 오랜 통증에 시달리거나 꾸준히 정신과 약을 복용하는 사람도 있다. 결국 육체의 쇠락과 고통을 피해 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통은 육체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생긴다. 근래 아들은 군대에 입대했다. 아내는 한동안 시름시름 앓더니 어느 날 쓰러지기까지 했다. 딸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나는 빈집에서 큰 상실감을 느낀다. 이른바 ‘빈둥지 증후군’이다. 약간의 우울감과 무기력, 불시에 엄습하는 슬픔과 죄책감이 마음을 짓누른다. 즐거운 일에 집중하려 애써도 몸은 몸대로 아프고, 마음은 마음대로 괴롭다. 그렇다. 고통은 우리가 외면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일터의 고통, 관계의 고통, 사회적 갈등과 재난 속의 고통까지, 고통은 삶의 전 영역에 널려 있다.
 
고통은 불쾌한 육체적인 감각이고 부정적인 감정이며 원치 않는 괴로움이다. 그래서 고통은 환영받지 못한다. 가능한 한 삶에서 멀리 밀어내야 할 불청객이자, 행복을 방해하는 훼방꾼일 뿐이다. 그러나 고통은 줄어들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바울이 평생토록 시달렸던 ‘육체의 가시’처럼, 고통은 삶 속에 깊이 심겨 있다. 그렇다면 드러난 고통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원망하거나 거부하는 태도를 넘어, 이제는 근본적으로 달리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안셀름 그륀 신부는 『아래로부터의 영성에서 영성의 역사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는 ‘위로부터의 영성’, 다른 하나는 ‘아래로부터의 영성’이다. 위로부터의 영성은 성경을 공부하고 신앙의 계율을 지키며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려는 길이다. 반면 아래로부터의 영성은 고통의 자리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데서 시작되는 길이다. 약함과 상처와 질병은 우리를 곤궁의 심연으로 끌고 내려간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마주하며 그 의미를 묻고 씨름할 때, 그 낮은 자리에서만 드러나는 이상한 은혜가 있다. 이것이 바로 ‘아래로부터의 영성’이다.
 

“아래로부터의 영성은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에 들어서서 그분을 향해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 일방통행의 길이 아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그보다는 오히려 잘못된 길, 돌아서 가는 우회로, 실패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실망들을 통해 더 잘 찾아갈 수 있는 것이다.”(8p)

 
고통의 심연은 불행의 자리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가 될 수 있다. 그러니 병든 몸 때문에 약해지거나 부정적인 감정 때문에 의기소침해져 낙심할 필요는 없다. 그 자리야말로 아래로부터의 영성이 시작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음을 붙드는 내 결단이 중요하다.
 

안셀름 그륀, '아래로부터의 영성'

 

고통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만약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문지방에 걸려 넘어져도 발가락이 아프지 않고, 손가락이 칼에 베여도 아무렇지 않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슈퍼 히어로가 되는 것일까?
 
외과 의사이자 한센병 전문의인 폴 브랜드는 『고통이라는 선물』(개정판 제목 『아무도 원하지 않는 선물』)에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의 이야기를 전한다. 어느 날 네 살 된 탄야가 엄마 손에 이끌려 그의 앞에 나타났다. 의사가 발목을 감싼 붕대를 풀자, 골절된 뼈와 심하게 감염된 발바닥이 드러났다. 괴사된 피부 틈으로 뼈가 보였지만, 아이는 무덤덤했다.
 
탄야의 엄마는 아이가 갓 돌을 지났을 때부터 겪어온 일을 들려주었다. 열일곱 달 무렵, 아이가 종이에 빨간 소용돌이를 그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크레파스가 아니라 아이의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였다. 탄야는 자기 손가락을 물어뜯으며 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에도 못이나 압정 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걸었고, 관절에 큰 손상을 입어도 아파하지 않았다. 그는 ‘고통에 대한 선천적 무감각’이라는 희귀한 유전 질환을 앓고 있었다. 결국 열한 살이 된 탄야는 두 다리를 절단했고, 손가락 대부분을 잃었다.
 
폴 브랜드는 이 이야기를 통해 고통에 대한 새로운 결론에 도달한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초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몸을 지킬 수 없는 불행한 환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고통은 인간이 가진 특권이며, 자신을 보호하고 존중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 정의는 현재 고통받고 있는 이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나 역시 1년 넘게 어깨 통증을 앓고 있다. 통증 때문에 밤잠을 설쳤고,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불편했다. 그러나 고통이 하나님의 선물이며 특권이라는 사실을 되새겨 본다. 팔을 전혀 쓸 수 없는 것은 아니니 감사하다. 여전히 두 팔 들어 축도할 수 있음이 은혜다. 운동과 치료를 통해 좋아질 수 있다는 사실도 기쁜 소식이다. 전립선 비대증 진단 역시 마찬가지다. 신체의 노화라는 측면에서는 서글픈 일이지만, 인생의 계절이 가을로 접어들었음을 깨닫게 해 준다.. 여름에서 겨울로 가는 길목의 쓸쓸함이 있지만, 동시에 영원한 본향에 한 걸음 더 다가왔음을 상기시킨다. 그 사실이 조급증을 줄이고, 현재를 더 충만히 살고 싶게 만든다. 자녀들 때문에 겪는 정서적 고통도 그렇다. 멀리 떠난 딸과 군대에 간 아들이 남긴 빈자리가 그리움과 허전함을 가져오지만, 다른 시선으로 보면 그것 또한 선물이다. 물리적으로는 멀어졌지만, 정서적으로는 오히려 더 가까워졌다. 짧은 대화 속에서도 더 진솔하게 마주하게 된다. 무엇보다 간절히 기도하게 되고, 자녀들을 하나님의 손에 온전히 맡기게 되니, 그 고통이 오히려 축복이 된다. 고통이 없었다면 절실히 깨닫지 못했을 은혜들이다.
 
고통은 당장 우리의 시야를 좁히고 불행하게 만든다. 그러나 시선을 달리하면, 그것은 단순한 불행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요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임을 알게 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일 때,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선물이었음을, 소홀히 여겼던 일상이 은혜였음을 깨닫게 된다.
 

폴 브랜드, <고통은 선물이다>

 

고통은 하나님의 메가폰이다

 
내 어깨통증의 원인은 회전근개 질환이다. 어깨와 팔을 연결하는 네 개의 근육과 힘줄 어딘가가 파열되어 아픈 것이다. 오른팔을 안쪽으로 돌린 채 들어 올리면 90도 부근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진다. 바르지 못한 자세와 운동 부족이 쌓여 생긴 퇴행성 손상일 것이다. 치료에는 체외충격파 요법도 포함된다. 고에너지 음파를 아픈 부위에 쏘아 염증을 줄이고 조직을 재생시키는 치료인데, 순간적으로 극심한 통증이 따른다. 장기적으로는 고통을 줄이는 과정이지만, 치료 중에는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생각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이 고통을 멈춰 달라!”라는 절규만 남는다. 왜 이 지경이 되도록 자신을 방치했는지 자책할 뿐이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 다 나으면 반드시 운동을 꾸준히 하겠다는 결심이 생긴다.
 
고통은 의지보다 강하다. 수년 동안 아내가 함께 필라테스를 하자고 권했지만 나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치료가 길어지고 두려움과 죄책감이 겹치자 결국 운동을 시작했다. 완고한 고집을 내려놓는 데 고통이 큰 몫을 한 셈이다.
 
C.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에서 고통을 단순한 불행으로 보지 않는다. 고통은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일깨우는 통로가 될 수 있다. 고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더 낮은 자리에서 인간의 한계를 깨닫게 되며, 바로 그 지점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아래로부터의 영성’이 시작된다. 루이스는 이를 “고통은 하나님이 우리의 귀를 열어주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메가폰”이라고 표현했다. 고통은 경고이자 초청인 셈이다.
 

“하나님은 쾌락 속에서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며, 고통 속에서 소리치십니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입니다.”(141p)

 
평안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잘 찾지 않는다. 말씀조차 흘려듣는다. 그러나 귀 막힌 우리를 흔들어 깨우시기 위해, 하나님은 고통을 사용하시기도 한다. 그러므로 고통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기회가 된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고난의 유익이며,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육하시는 방식이기도 하다.
 
물론 하나님이 고통 자체를 계획하신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겪는 극심한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것을 메가폰 삼아 당신의 음성을 들려주신다. “돌아오라, 가까이 오라, 정신을 차리라”는 초청과 경고의 음성이다. 백혈병 진단을 받은 딸 때문에 두려움과 죄책감 속에 교회를 찾는 부모가 있다. 그 병의 원인이 하나님은 아니지만, 고통을 통해 돌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것이다. 착한 아내가 폐암 판정을 받았을 때, 평생 담배를 끊지 못하던 남편이 비로소 귀를 열고 회개한다. 교만에 빠진 느부갓네살 왕도 하루아침에 권좌에서 쫓겨나 극심한 고통을 겪은 끝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회개했다. 루이스 자신도 아내 조이를 암으로 잃은 후, 깊은 슬픔 속에서 이론적 신앙을 넘어 하나님과의 실제적 관계를 더 깊이 탐구했다.
 
고통은 메시지다. 하늘에서 내게 들려주시는 사랑의 메시지다. 완고하고 자기중심적인 나를 깨뜨리시는 하나님의 마지막 수단이다. 그러므로 고통 중에도 감사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은 없고, 다시 그분께로 가까이 가는 것보다 더 큰 은혜는 없기 때문이다.
 

C.S.루이스 <고통의 문제>

 

고통으로 가장한 은혜

 
고통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메가폰이다. 좋은 은유다. 아마도 이 두 정의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고통의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통의 크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어깨 통증 같은 일상적인 고통이 아니라, 뉴스에서 접하는 끔찍한 재난 같은 고통 말이다.
 
제럴드 싯처는 교통사고로 아내와 어머니, 딸 하나를 동시에 잃었다. 극심한 비극이다. 현대판 욥의 고난이라 불러도 과하지 않다. 그가 겪은 공포와 상실, 두려움과 혼란, 그리고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비탄은 결코 공유될 수 없는 고통이다. 이 세상에서 견줄 만한 것도 많지 않은 크기의 고통이다. 그런 고통을 당한 이에게 “고통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거나 “고통은 하나님의 메가폰”이라고 섣불리 말하는 것은 자칫 잔인할 수 있다. 고통의 의미를 어설프게 논하는 것 자체가 욥의 세 친구가 빠졌던 오류와 다르지 않을 수 있다. 우리에게 허락된 태도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 고통당하는 자가 어둠을 지나 나아가는 모습을 응원하며 지켜보는 일뿐이다.
감사하게도, 싯처는 지옥 같은 상실로 삶이 산산이 부서졌지만 그 틈새로 스며든 은혜를 만났다. 그에게 고통은 숲이었고, 그는 그 숲에서 길을 잃은 자였다. 심지어 자신이 고통 그 자체이기도 했다. 그러나 끝내 싯처는, 고통으로 인해 비록 삶이 축소되었으나 은혜로 인해 영혼이 확장되는 체험에 이르렀다. 그 빛나는 과정이 『하나님 은혜』(『하나님 앞에서 울다』 개정판)와 『하나님의 뜻』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는 상실의 고통을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고통의 의미를 끝까지 붙들고 물음으로써 그 안에서 자라나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주어진 자리에서 매 순간 작은 일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임을 받아들였다. 고통은 그 뜻 안에서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임을 인정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고통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고, 현재의 삶에 더 충실해졌으며, 영혼은 더욱 깊고 넓게 자라났다.
 
싯처의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내게도 남모르는 고통이 있다. 그 의미는 여전히 불투명하고, 꺼내놓기조차 민망하고 두렵다. 과연 이 일로 하나님께 영광이 드러나는지, 아니면 오히려 그분의 영예를 가리는 아이러니한 고통인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어머니는 스무 살에 시집왔다. 시동생이 여섯이나 되었고, 시부모님은 병들어 계셨다. 가난의 무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무거웠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지만, 그때 예수님이 어머니를 만나주셨다. 어머니는 은혜로 버텼고, 기도로 그 가난과 고난을 이겨내셨다. 젊은 날은 고통으로 점철되었으나, 중년 이후에는 형통이 선물처럼 주어졌다. 계절은 그렇게 흘러 어느새 겨울에 이르렀다. 그러나 혹독한 겨울이다. 남편을 암으로 잃은 뒤, 어머니의 상실감은 채워지지 않았다. 팔십이 되기도 전에 치매가 시작됐고, 노인성 우울증이 덮쳤다. 모진 생을 기도로 견디셨던 어머니의 영혼이 서서히 남모르게 알코올에 잠식되었다. 행복한 일상이 무너지고, 이제 어머니는 병원의 보호를 받고 계신다.
나는 이 사실로 인해 고통스럽다. 축복으로 마무리되어야 할 어머니의 삶의 결론이 잘못된 것 같아 불안하다. 충분히 돌보지 못한 죄책감이 가슴을 짓누른다. 어떤 노력에도 회복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아 좌절된다. 마음이 아프고, 목사로서의 사역조차 흔들린다. 내게 신앙을 물려주신 어머니의 마지막이 기도 대신 알코올 의존의 시간이라니.
 
싯처가 극심한 상실 속에서 건져 올린 은혜를 생각한다.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상실의 아픔은 치유되지 않고, 과거의 상태로 돌아가지도 않는다. 어머니의 상태는 계속 악화될 것이고, 그분의 고통은 자녀에게 번지며, 나 역시 계속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생각한다. 젊은 날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예수님을 만나셨던 어머니라면, 말년에도 그분을 또다른 방식으로 만나게 되시리라. 고통이 깊어질수록 천국은 더욱 간절한 소망이 되고, 인생의 말년이 잔인하게 여겨질수록 천국은 더욱 생생한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알코올과 우울로 인해 뇌세포의 빛이 하나둘 꺼져갈수록, 어머니의 영혼은 또 다른 생명으로 거듭나는 기적을 만들 것이다. 그 길 위에서 내가 만나는 모든 작은 일들에 충실히 마주할 수만 있다면, 고통은 여전히 고통으로 남고 가슴 한켠은 아프겠지만, 결국 나는 고백하게 될 것이다. 이 고통은, 고통으로 가장된 은혜였다고.
 

제럴드 싯처, <하나님의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