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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시니어매일성경

존재로 사랑받다

신의피리 2025. 10. 15. 07:00

시니어매일성경 11-12월호 / 일상이 선물이다 6


존재로 사랑받다

김종필 목사
 

 
동기 목사 모임에 다녀왔다.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다짐한 적이 있었는데, 굳은 결심을 그새 다 잊은 채, 또 오라는 말에 넙죽 다녀왔다.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다시 다짐한다. 다시는, 다시는 동기 목사 모임에 나가지 않겠다.
이 목사 모임에 다녀오면 마음이 이상하게 흔들린다. 멀쩡히 목회 잘하고 있었는데, 마치 한참 뒤처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한결같이 잘해 주는 성도들에게 괜히 서운한 마음도 들고, 목소리에는 자꾸 냉기가 서린다. 늘 소중히 여기며 감사하던 목회에 자신감이 사라지니, 교회 가는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겁다. 아무래도 시험에 든 것 같다. 마귀가 목회자들을 유혹하려고 즐겨 찾는 장소가 있다면, 아마도 목사 동기 모임일 것이다. 거기서 누군가 입을 빌려 제일 큰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를 칭찬하게 만든다면, 마귀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을지 모른다. 칭찬 한마디는 금세 허리케인이 되어, 소규모 목회를 하는 이들의 영혼에 먹구름과 비바람처럼 몰아칠 것이다. 그래서 다시는 나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비교 의식은 영혼을 갉아먹는다. 나보다 못한 사람과 견주면 금세 우쭐해지고, 나은 사람 앞에서는 금세 위축된다. 사울 왕이 왜 몰락했는가? 백성들이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던 다윗 장군을 칭송하는 노래에 자신을 비교했기 때문이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그날 이후, 사울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윗과 비교하기 시작했고, 그 비교 의식은 그를 거만하게 만들고, 결국 초라한 영혼으로 병들게 했다.
 
내가 이 모임에 나가지 않으려는 이유는, 원치 않는 비교 의식과 씨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동기 모임은 늘 가장 큰 교회를 섬기는 목사의 교회에서 열리거나, 그가 평소엔 잘 가지 않을 만한 거한 음식이 차려진다. 좋게 보면 좋은 일이다. 그런데 나는 밴댕이 소갈딱지인가 보다. 그런 게 못마땅하게 보인다. 성도들이 지극정성으로 목사를 보필하는 모습도 어딘가 어색하고 불편하다.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온갖 목소리가 마음을 구정물처럼 변질시킨다. 한동안 마음 가장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시궁창 냄새 나는 목소리들과 씨름해야 한다. 비교가 불러일으킨 열등감에 쓰러진 병든 자아가 구시렁대는 소리다.
 
어느새 마음 밑바닥에서 불쑥 목소리가 튀어 오른다. 두더지 게임이라도 하듯, 곧고 바른 양심은 서둘러 그 소리를 두들겨 팬다. 하지만 이 목소리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다 마침내 마음의 거실까지 침투한 하나가 그 안에서 온갖 환상적인 드라마를 만들어 낸다. 나를 막장 드라마 비련의 주인공으로 만든다. 그런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순간, 병든 자아의 골방으로 향하는 지름길을 걷게 된다. 이럴 때 나는, 마치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말씀으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셨듯이, 내면의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내겐 그 유혹을 이길 무기가 있다.
 

 
거룩한 욕망 이면에 숨긴 인간적인 야망

 
내 거실을 장악한 목소리 하나가 은밀히 속삭인다.

‘너도 저 큰 교회당, 높은 강단 위에서, 많은 성도 앞에서 설교 한번 해보고 싶지 않아? 그래야 성공한 목회라고 할 수 있지 않겠어? 그렇게 작은 교회에서 네 황금기를 다 보내고 은퇴할 거야?’

 
나는 이 목소리가 마귀의 유혹이라는 걸 안다. 그럼에도 이 속삭임에는 묘한 힘이 있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성공’을 꿈꾸며 자랐다. 자녀가 대기업에 들어가면 부모는 자부심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목사를 자녀로 둔 많은 어머니도 자식이 큰 교회 담임목사가 되는 걸 목회의 성공이라 여겼다. 신학교에 다닐 때, 동기 중 일부는 ‘십만 목회’, ‘백만 목회’를 꿈꾸며 이야기하곤 했다. 큰 교회에서 목회하는 것이 곧 성공이고, 그런 꿈을 꾸는 것을 ‘비전’이라고 여기는 분위기였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보통의 목사들이 거룩한 말투와 성령 충만한 기운으로 ‘비전’과 ‘열정’을 말할 때, 나는 그 속에 대한민국의 보통 남자들이 품는 노골적인 ‘성공을 향한 야망’이 겹쳐 있음을 신학교 시절에 알게 됐다. 당시 나는 한 교수님의 연구 조교로 일한 적이 있다. 그분은 책을 출간할 예정이었고, 원고 교정부터 출판까지 도와줄 조교가 필요했다. 마침 출판사에서 책을 만들어본 경험이 있던 내가 그 일을 맡게 되었다. 평소 존경하던 교수님이었기에, 주중엔 학교 과제로 쫓기고 주말엔 교회 사역으로 바빴지만, 기꺼이 도왔다.
돌이켜 보면, 그 결정은 목사가 되기로 한 이래, 아니 20년 넘게 목회자로 살아오며 내가 내린 수많은 결정 중 가장 잘한 일이었다. 교정을 위해 수없이 읽고 또 읽었던 그 원고 속에서, 나는 비전과 욕망이 교묘히 결탁한 우리 시대 교회의 비극을 목격했다.
박영돈 교수의 『성령충만, 실패한 이들을 위한 은혜』는 수많은 경건과 거룩의 언어로 포장된 인간의 간교한 욕망을 벗겨낸다.
 

“한국교회의 부패는 ‘욕망의 세속화’에서부터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특별히 목회자들이 성령의 소욕으로 교묘히 위장된 육신의 소욕, 즉 힘과 성공과 명예에 대한 욕망에 이끌려 성직을 수행하고 영적인 일을 해온 것이 한국교회의 신앙과 영성을 세속에 오염시켜 혼탁하게 하고 뒤틀리게 하는 근본 요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307p)

 

 
큰 교회가 좋은 교회이고, 큰 교회의 담임목사가 성공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규모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설교를 잘하고, 조직 관리를 잘하고, 대중의 심리를 잘 읽으면 사람은 얼마든지 모일 수 있다. 물론 목회자가 성경대로 바르게 목회할 때, 성령님의 역사로 부흥하는 예도 있다. 그러나 규모는 인간의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다. 교회당의 크기와 성도 수가 목회자의 인격과 정비례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규모와 성장을 목표로 삼을 때, 목회자는 성도를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여기게 되고, 숫자가 영성을 판단하는 황당한 기준이 되기 쉽다.
 
나는 『성령충만, 실패한 이들을 위한 은혜』를 자주 펼쳐본다. ‘성령충만은 우리의 신실함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우리의 실패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 책의 핵심 메시지 하나만으로도 깊은 위로가 되기 때문이고, 성공을 향한 욕망이라는 잡초들을 초기에 제거해 주기 때문이다.
 

 
칭찬과 인정은 나의 힘

 
마귀의 첫 번째 속삭임은 지금 내게 그리 강력한 유혹은 아니다. 거룩한 비전과 인간적 야망은 이제 쉽게 구별된다. 헨리 나우웬이 그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좋은 척도를 제시해 주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길은 상향성을 종교로 삼지만, 그리스도의 길은 철저히 하향적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구유 위에 나신 것도 하강이었고, 인간의 자리에서 다시 종의 형체로 낮아지셨으며, 마침내는 십자가 위에서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는, 버림받은 죄인의 모습으로 죽으셨다. 그리스도의 길은 낮은 곳을 향해 굽이굽이 흘러가는 강과 같다. 그분을 따르는 제자의 길도 마찬가지다.
나는 나우웬의 책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을 줄 치며 반복해 읽었고, 그의 문장들은 내 인격에 깊이 새겨져 있다. 그 말, 곧 ‘그리스도의 길은 하향적인 길이다’라는 말 하나 때문에 나는 더 좋은 자리로 갈 수 있는 기회를 내려놓고, 다소 불편하고 어려운 이들의 손을 잡으며 여기까지 왔다. 그렇기에 ‘목회 성공’이라는 말이 나를 잠시 흔들 수는 있을지언정, 넘어뜨릴 수는 없다.
 

 
그러나 단단한 방어막도 종종 뚫릴 때가 있다. 큰 교회에서 성도들이 “우리 목사님은요….” 하며 그 목사의 설교와 인품을 칭찬하는 것을 들을 때다. 그 순간, 함께 기뻐해야 할 내 마음이 일그러진다. 내 안에 꾹꾹 눌러두었던 인정 욕구가 화산처럼 터져 나온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목적으로 삼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칭찬에 고갈된 내 영혼이 어두운 그늘 뒤에서 불쑥 얼굴을 내민다.
 
나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아니, 단순히 있는 정도가 아니라, 때론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크다. 나는 설교에 은혜받았다는 말을 매번 듣기를 갈망한다. 기도 덕에 힘을 얻었다는 말도 듣고 싶다.
우리 목사님은 설교도 잘하고, 기도도 깊고, 사람을 사랑하며, 복음에 목숨을 건 분이에요.”
이런 말을 듣고 싶다. 물론 이 욕구를 내 입으로 드러내놓고 말하진 않는다. 다만 마음 깊은 곳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잘 통제되던 이 욕구가 댐이 무너지듯 터질 때가 있다. 동료 목사가 칭찬받고 인정받는 순간이다. 이 무너진 댐을 복구하는 데는 적잖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조금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내 안에 엄청난 인정 욕구가 있음을 깨달은 적이 있다. 한 대형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사역하던 시절, 중보기도특별집회에서 설교하게 되었다. 집회를 마친 후, 나는 늘 하던 대로 사무실로 가려 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나는 곧장 친교실로 향했다. 집회 후 성도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던 자리였다. 성도들과 눈을 마주치며,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어슬렁거렸다. 그 순간, 마치 내 자아와 몸이 분리되어 내 영혼이 나를 관찰하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내 엄청난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나는 누군가가 “오늘 설교 너무 은혜로웠어요.”라고 말해 주길 기대하며, 그 자리에 머물고 있었다.
 
책 제목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도널드 맥컬로우의 『모자람의 위안』에도, 나와 똑같은 고백이 담겨 있다. 그는 예배 후 화장실에서 함께 볼일 보던 성도에게 그 말을 듣고 싶어 안간힘을 쓰다, 자신을 이상한 변태, 비루한 정신병자처럼 느꼈다고 고백한다. 황급히 그 자리를 피한 그는 곧장 교회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도들이 던질지도 모를 칭찬 한마디에 목이 말라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때, 자신이 ‘인정 중독’에 걸렸음을 깨달았다.
 

“나는 마치 자기 자신에게 진저리를 치면서도, 술에 목말라 숨겨 둔 술병을 꺼내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비우는 알코올 중독자 같았다.”(158p)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은 마약 같다. 순간적으로 기분을 띄우고 자신감을 준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과도한 인정 욕구는 자아를 병들게 한다. 삶의 목표가 오직 권위자에게 인정받는 데에 집중될 때, 삶은 조작된 연기와 집착이 되기 쉽다. 인정을 받기 위해 연기력을 발휘해야 하고, 그런 고투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것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칭찬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누구도 쉽게 비난할 수 없다. 나는 성도의 인정과 칭찬 속에서 자라고 힘을 얻는다. 그 욕구 자체를 ‘믿음 없음’으로 몰아붙일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 욕구가 내 이성을 마비시키고 어색한 행동을 추동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이 욕구를 다스리는 길은, 내 안에 그런 욕구가 있음을 정직하게 직시하고, 부드럽게 보듬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강단 위와 아래에서 서로 다른 인격으로 살아가게 된다. 주일과 주중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칭찬과 인정은 목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잡으려 하면 도망가고, 누르려 하면 튀어나오는 성질을 갖기 때문이다.
 
 

행위가 아닌 존재로 사랑받는 자

 
마귀는 참 끈질기다. 적어도 같은 일에 대해 세 번은 유혹하는 듯하다. 동기 목사 모임에 다녀온 후, 목회 성공에 대한 욕망의 토네이도가 몰아쳤다. 다행히 마음의 변두리만 스쳐 지나갔다. 이어서 인정 욕구의 폭우가 쏟아졌고, 삶이 잠시 엉켰지만 곧 회복됐다. 그런데도 평온은 돌아오지 않았다. 마치 요나답이 암논 곁에 다가와 교묘히 욕망을 부추겼듯, 꺼졌다고 여겼던 또 다른 욕망의 불씨가 다시 활활 타오른다. 아니, 이것은 욕망이라기보다 생의 활기를 앗아가는 죽음의 후폭풍에 가깝다.
‘더 이상 바라는 것도, 이루고 싶은 것도 없다. 그냥 오늘 밤 눈 감았다가, 내일 아침 그대로 천국이면 좋겠다.’
마음의 지하실, 깊은 시궁창에서 낮고 음산한 소리가 울린다. 무기력한 삶을 부추기는 소리다. 마치 에스겔 골짜기에 흩어진 마른 뼈들의 한숨 같다.
내가 이 광대한 우주에 한 점만 못 한 존재로 남는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누구에게도 존귀하거나 보배롭지 않은, 그저 그런 존재라면 이 생명은 왜 이리 쓸데없이 긴가?’
이 소리는 인생을 통달한 이의 성숙한 지혜가 아니다. 지혜를 가장한 마귀의 유혹이다. 나를 무가치한 존재로 묶어두려는 속임수다. 활기차게 목회 현장으로 달려갈 때 가장 손해를 보는 존재의 교묘한 계략이다. 내가 내 삶의 가치를 판단할 때, 이룬 업적이나 매력적인 성격, 자랑할 만한 성과의 ‘작음’을 집요하게 조명해 나 자신을 작고 하찮은 존재로 여겨지게 만든다.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아’, ‘아무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아’ 이런 생각을 불러일으켜, 정신의 연옥에 가두려는 수작이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다.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그 위에 임하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4:17)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울렸을 것이다.너는 내 사랑하는 자다. 나는 너를 기뻐한다.’ 이 음성이, 인간이 되신 예수의 내적 힘이었으리라. 적들의 위협에도, 제자들의 배신과 도망에도, 오늘 환호하던 무리의 내일 비난에도, 심지어 하늘 아버지께서 얼굴을 숨기신 침묵에도, 예수님은 낙망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존재 자체로 사랑받는 자셨기 때문이다.
 
헨리 나우웬은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에서,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임을 증명하라고 다그치는 이 시대 속에서 우리가 반드시 들어야 할 음성이 바로 예수님께 들렸던 그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말한다.
 

“영적인 삶의 가장 큰 적이 바로 자기 거부인 이유는, 그것이 우리를 ‘사랑받는 자’로 부르신 거룩한 목소리를 부인하게 하기 때문이지. 사랑받는 자가 되는 것은 우리 존재의 핵심 진리를 표현하네.”(26p)

 
 

 
우리 내면에는 끊임없이 울리는 ‘자기 거부의 목소리’가 있다. 자기 비난의 목소리다. 그리스도의 하향성을 걷는 나를 비웃는 소리다. 세상의 기준으로 조롱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온 삶을 평가절하하는 소리다. 이 소리는, 우리가 존재 자체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임을 잊게 만든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아무리 성취가 작고 실패와 고난이 길지라도, 처음처럼 작고 미약한 삶을 살아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요 그분이 기뻐하시는 자라는 이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나는 앞으로도 동기 모임을 비롯한 여러 모임에 나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비교 의식으로 나를 미혹하는 마귀는 더 이상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이룬 것과 내가 소유한 것, 자랑할 만한 것들과는 무관하게, 존재 그 자체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