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ent is Present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순례, 그 땅을 걷다 27

[수도원기행5]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내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행 19:21) 2015년도에 바울 사도의 발자취를 따라 터키-그리스를 다녀온 적이 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그가 걸었던 길을 걷고, 그가 설교했던 아레오바고를 오르고, 그가 세례를 줬던 빌립보 강기테스 강가에 앉았을 때, 형용할 수 없는 은총이 쏟아져 내렸다. 순례의 참 의미를 알았다. 그때 비로소 로마가 가고 싶어졌다. 다른 이유는 없다. 바울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은 것이 제일 큰 이유다. 그리고 드디어 로마에 입성했다. 콜로세움, 포로 로마노, 개선문 등을 보았다. 가히 로마는 살아있는 역사유물관이다. 로마 시내도 잠시 걷는다. 전 세계 모든 민족이 다 와있는 것 같다. 주말이라 그런지 시내엔 형형색색의 얼굴빛을 가진 이들이 붐빈다. 눈은 즐겁고, 다리는 무..

[수도원기행4] 작고 평범하고 단조로워서 좋은 것

시차 적응 중이다. 첫날은 새벽 1시에 깼고, 둘째 날은 새벽 2시, 셋째 날은 새벽 4시에 깼다. 몸이 아주 정직하게 반응한다. 새벽 시간이 가장 정신이 맑을 때다. 글 쓰기 좋은 시간이다. 고요한 새벽, 글 쓰는 아내를 방에 두고 혼자 나선다. 아직 수도원 관리인이 출근 전인가 보다.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추워서 다시 들어오려는데, 문이 안 열린다. 걸으라는 사인이다. 스콜라스티카 수도원에서 수비아꼬 수도원까지 걷는 길이 있는 표지판을 봐둔 게 있다. 걷는다. 이른 새벽에 홀로 ‘거룩한 동굴’로 올라간다. 기도하기 위해 동굴로 들어간 이, 동굴로 들어간 이의 말씀을 들으러 올라가는 이들, 그들이 걸어 올라간 자연 그대로의 길이다. 처음으로 관광객이 아니라 순례자가 된 기분이다. 순례는 앞서 걸어간 이..

[수도원기행3] 마음을 드높이

몬테카시노에서 수비아코로 이동했다. 수비아코는 강원도 산골짝 느낌이다. 작고 경사진 곳에 세워진 작은 마을 한가운데로 52인승 버스가 지나간다. 4~5층 짜리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테라스에서 담배 피우는 중년의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나도 모르게 미소로 인사를 한다. 저 여성은 동양 남자의 미소인사를 어떻게 생각할까. 마을 외곽 조금 더 높은 곳으로 버스가 묘기 부리듯 올라간다. 스콜라스티카 수도원에 도착한다. 오늘은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숙소에 머문다. 수도원 내부는 미로처럼 설계되어 있는데, 이곳은 조금 특이하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 오래전에 지은 건물이 나온다. 가장 안쪽 건물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 한다. (가이드의 통역설명에 의하면) 입구에서 처음 들어섰을 때는 좀 밋밋했..

[수도원기행2] 순례객은 늘지만 수도사는 줄고 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_ 중 by 유홍준 순례의 성패는 이 문장에 달렸다. 사랑하지 않으면 가봐야, 만나봐야 아무 의미 없다. 사랑없이 가면 들어봐야 참된 앎에 이르지 못한다. 앎을 향한 갈망없이 암만 사진 찍고 들여다봐야 의미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 관건은 사랑이다. 베네딕토 수도원 순례를 왜 가려는가. 아내 때문이다. 아내는 눈이 매력이다. 반짝반짝 빛났고 그게 내가 사랑에 빠진 이유다. 평소에도 빛나는 눈이었는데, 근래 그 눈이 더 반짝이기 시작했다. 영혼이 충만해 진 것이다. 오랜 공부와 기도 끝에 순례를 가겠다 한다. 수도원을 가겠다는 아내의 결기는 견고했다. 그 견고함이 나를 움직였다. 마침 결혼 25주년을 맞았고, 아내가 원하는 여행에 동행하..

[수도원기행1] 인천에서 로마까지

13시간 비행 예정이다. 비좁은 공간에서 13시간을 보내야 한다. 어떻게? 일단 내게 ‘잠’은 허락되지 않는다. 청해도 오지 않는다. 내 집 내 침대에서는 청하지 않아도 잘도 오드만. 아내는 집에선 그렇게도 잠이 없더니, 참 잘 잔다. 여하튼 시간을 보낼 친구들이 필요하다. 첫 번째 친구. 영화 . 별 3. 영화와 감독 모두에게 실망. 엇나간 조국애, 전쟁광, 이해할 수 없는 조세핀과의 사랑. 잔뜩 기대한 것에 비해 실망감은 크다. 믿었던 감독인데… 혹시 나폴레옹에 대한 감독의 평가가 고스란히 영화의 수준과 관람객의 평가로 나타나게 하려는 고도의 수법일까? 에이. 2시간 30분 소요. 두 번째 친구. 영화 . 별 3개 반. 일평생 꼬장꼬장한 공무원으로 살던 주인공이 말년에 말기암 판정을 받는다. 꿈꿨던 ..

일상순례자7_꿈과 현실

일상순례자7_꿈과 현실 꿈은 현실일까, 비현실일까. 손에 잡히는 현실 같기고 하고, 아스라이 사라지는 비현실 같기고 합니다.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성지순례는 꿈인 듯 아스라이 저 멀리 도망가 있습니다. 혹시 성지순례라는 꿈을 꾼 건 아닐까. 변화산 위에서 예수님께서 모세, 엘리야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것을 베드로가 목격했습니다. 그 황홀경 속에서 베드로는 ‘여기 있는 게 좋사오니, 초막 셋 짓자’고 이야기합니다. 지금의 제가 딱 베드로 심정입니다. ‘성지순례의 추억과 그 은혜가 좋사오니’... 물론 산 위에 머무를 때가 있고, 반드시 그런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산 아래로 내려와야 할 때도 있습니다. 산 아래 동네는 고통과 눈물, 수고와 애씀이 있는 우리의 일상입니다.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고..

일상순례자6_다짐

일상순례자6_다짐 왜 꼭 그래야만 하는 걸까? 약간의 의구심과 함께 불편한 마음이 가득 차오릅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백성들이 그 다음 불평을 합니다. 여리고성을 이긴 여호수아가 그 다음 쪼그만 작은 아이 성에 패배합니다. 바알신과 아세라신을 섬기는 제사장 850명과 싸워 이긴 엘리야가 그 다음 이세벨의 위협이 무서워 광야로 숨어들어 갑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최초로 한 베드로가 그 다음 주님으로부터 “사탄아!”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왜 꼭 그래야만 하는 걸까? 그랬을 수밖에 없었을까요? 성지순례 이후 다짐 또 다짐해보았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가 일상 순례의 노래로 이어지게 하리라, 변화산 위 은혜로운 경험이 산 아래 눈물과 한숨으로 얼룩진 ..

일상순례자5_아픈 과거

아픈 과거 오늘 성령님께서 바람을 타고 지나시다가 제 귓가에 살짝 속삭이셨습니다. "누구나 아픈 과거가 있단다. 긍휼의 마음을 잊지 말거라." 낯설고 어색한 그냥 타인에 불과한 사람이 어느 날 제 영혼의 영지 속으로 성큼 들어오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의 아픈 과거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 아픈 과거와 공명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픔과 나의 아픔이 얽히고 섥혀 네 아픔이 내 기도가 되고, 내 아픔이 너의 기도가 됩니다. 마주 보고 앉아서, 나란히 앞을 보고 앉아서, 타인의 아픈 과거를 들었습니다. 누구나 아픈 과거가 있었습니다. 그도 많이 울었겠구나 생각하니 제 마음이 아픕니다. 일상을 살다보면 "일"에 매몰되어 "사람의 아픔"이 안보이곤 합니다. 쓸데없는 일 걱정에 휩쓸려가려 하니 성령님께..

일상순례자4_포옹

포옹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 중에 하나는 타인을 껴안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가 아니고서는 타인을 껴 안을 때가 별로 없습니다. 아내와 자녀라고 해서 매일 껴안는 것도 아닙니다. 보통의 경우 우리는 '사랑스러울 때' 껴안게 됩니다. 포옹을 하려면 먼저 팔을 활짝 벌려야 합니다. 어? 그런데 희안합니다. 팔 벌린 모습이 왠지 십자가를 닮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사형틀 중에 하필 '십자가형'으로 죽으셨을까요? 그것도 골고다 언덕 꼭대기에서 말이지요.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듭니다. 십자가란 집 나간 자식 돌아오길 팔 벌려 기다리는 탕자의 아버지를 형상화 한 건 아닐까, 그것도 멀리서도 보라고 높은 언덕 위에 세워진 것은 아닐까 말입니다. 살아 있는 한, 할수만 있다면 최대한..

일상순례자3_선물

선물 선물을 주는 행위 이면에는 수많은 동기들이 작동합니다. 정말 좋아서 선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가끔 아주 나쁜 동기도 있습니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조금 더 앞설 때도 있습니다. 아주 드문 일이긴 하지만 받는 이를 모욕주기 위해서 선물을 줄 때도 있다고 합니다. 미래 보험용으로도 선물을 줄 수 있겠지요. 대개 선물은 주는 이도 행복하게 하고, 받는 이도 행복하게 합니다. 주는 것과 받는 것, 어느 것이 더 행복할까요? 비교할 수 없는 일이란 생각이 듭니다. 줄 때는 주는 것 자체로 기분이 좋습니다. 받을 때는 상대에게 꼭 갚아야 한다는 부담만 없다면 그 자체로 참 기분 좋은 일입니다. 신앙의 연수가 늘어나면서 깨닫게 되는 행복 중의 하나는 "주는 데에서 오는 행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