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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월 제주한달살기

[제주안식5] 걷고 먹고 만나는 일이 이렇게 감사한 일이라니

신의피리 2024. 4. 5. 20:30

목회자가 된 후 처음으로 안식월을 맞았다. 3개월이다. 첫 번째 달은 뉴질랜드에 다녀왔다. 사역과 여행을 겸했다. 결혼 25주년을 맞은 기념 성격도 있다. 두 번째 달은 제주에서 혼자 지낸다. 소위 제주한달살기를 하는 것이다. 앞으로 한 달간 나는 혼자다. 해야 할 의무도 없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 계획을 세울 필요도 없다. 그냥 살면 된다. 가고 싶은 곳이 떠오르면 가는 방법을 검색해서 가면 된다.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 

 

만남

오늘 사전투표 첫날이다. 이성실 목사님과 함께 인근 한경체육관에서 사전투표를 했다. 이성실 목사님은 사전투표제도를 그동안 몰랐다 한다. 이 좋은 제도를! 함께 투표하고 사진 한 컷! 서로 누굴 찍었는지에 대해선 전혀 말하지 않았다. 이성실 목사님은 2년 전 제주로 내려왔다. 목회자 사임하고 다시는 목회 안 하고 농사를 짓겠다 했다. 포도농사를 준비했다가 사모님의 반대로 그만두고 제주도로 내려왔다. 포도 대신에 귤농사를 지어서 지난겨울에 몇 번 주문해서 먹은 바 있다. 그런데 이성실 목사님이 이곳 제주에서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았다 한다. 조수교회 파트타임으로 섬기다가 담임이 되었다. 아직 위임까지 여러 과정이 남았고, 기도할 일들이 적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두 분 표정이 참 밝다. 즐겁게 행복하게 잘하실 듯싶고, 아주 잘 어울려 보인다. 

이성실 목사님과 함께

 

걷기

오늘도 걸었다. 12km, 1,500보. 신창리 봄봄카페에서부터 시작해서, 싱계물공원에 들어섰다. 젊은남녀들이 곳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풍경사진이나 셀카를 찍자니, 좀 지겹다. 젊은 커플들이 정답게 셀카 찍는 걸 뒤에서 몰래 찍는다. 옛날 생각도 나고, 보기 좋기도 하다. 내친김에 용수항까지 해안도로를 따라 걷는다. 14도 밖에 안되지만 태양이 뜨겁다. 멀리 차귀도가 보인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섬의 느낌이 난다. 지난달에 다녀온 뉴질랜드 남섬과 비슷한 느낌이다. 4월 중 차귀도에 한 번 가봐야겠다. 김대건신부가 중국 상해에서 라파엘이라는 배를 타고 들어오다 표류해서 용수항에 오게 되어 첫 미사를 드린 것을 기념한 기념관이 있다. 25세 어린 나이에 참수를 당했다. 우리나라 첫 사제이며 순교한지라 바티칸에서 성인으로 시성 했다 한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순교자들의 신앙은 아찔하기만 하다. 더 걸어야 한다. 오늘 하루 몫을 채워야 한다. 여기서부터 제주올레길 12코스에 연결된다. 잘됐다. 걷는다. 해안절벽길을 따라 당산봉으로 올라간다. 높은 지대에서 해 질 녘 차귀도를 내려다보니 장관이다. 해안길과 짧은 숲길을 지나 내려와서 고산리 농협에 들려 장을 봤다. 돌아오는 길은 202번 버스를 탔다. 

싱계물공원에 사진찍는 커플들이 많다

 

성김대건 신부 제주 표착 기념관, 용수항

 

올레길 12코스 당산봉길, 차귀도

 

먹기

오늘 점심은 그린사이공에서 껌승(숯불돼지고기밥)을 먹었다. 이성실목사님 내외분이 성도님을 숙소 근처에서 만나기로 한김에 나를 초대해 주셨다. 염치 불고하고 넙죽 응해서 함께 식사했다. (사진을 못 찍음) 점심은 계속 외식을 하게 됐고, 대신 저녁은 숙소에서 조촐하게 먹는다. 이성실 목사님이 제주김치(유채와 쪽파로 만든 김치)를 주신 게 있어, 오늘 저녁은 라면에 김치다. 숙소에 돌아와 라면을 끓이고 창가에 앉았다. 일몰시간이다. 구름 때문에 완전한 일몰은 아니었지만 나름 괜찮았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한 열 번은 한 것 같다. 

숙소에서 바라본 일몰

 

오늘도 걷고, 먹고, 만나고, 관조하고, 기도하고, 생각하며 보낸다. 지난 한달은 내내 마음속에 불안과 염려가 사라지지 않았는데 서서히 부정적 감정들이 가라앉고 있다. 밤잠도 매일 대여섯 번은 깨곤 했는데, 조금 더 잘 자는 것 같다. 콧물이 그치지 않는다. 수년간 비염 때문에 콧물이 나오지 않았는데 생각해 보니 요즘 며칠 째 콧물이 나온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감사하다. 감사하다. 참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