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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안식27-2] 한라산 등반

신의피리 2024. 4. 27. 23:45

내 몸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인식되고 있다. 종아리가 아프다. 알이 살짝 배긴 것 같다. 허벅지도 뻐근하다. 이유가 뭘까?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되지 않는 장면이 자꾸 머릿속에서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나는 어디를 다녀온 것인가? 사진이 합성된 것일까? 

한라산 백록담

 
5시 20분 잠에서 깬다. 사실 제대로 잠에 들지도 않았으니 깼다고 하기도 그렇다. 여하튼 대충 씻고 짐을 꾸린다. 생수 3개, 우비, 간식, 스틱, 이거면 되는 건가?
6시 출발한다. 차의 창문을 열고 사진을 찍는다. 바로 저기, 저 멀리 있는 저 산, 저 봉우리, 매일 보던 바로 그 한라산에 오늘 오를 예정이다. 과연 오늘 하루가 지나갈 것인가? 나는 해낼 수 있을까?

 
7시 관음사 주차장에 도착한다. 매점에서 김밥과 국수로 아침 배를 채운다. 
7시 20분 한라산 등반을 위해 입구에서 사전에 신청한 큐알 코드를 보여주고 입장한다. 세 남자가 파이팅을 외친다. 동조 형제는 한라산을 서너 번 등반한 경험자고, 종훈 형제와 나는 초짜다. 둘 다 저질체력이다. 둘 다 걱정이 태산이다. 동조 형제가 아주머니들도 다 오르는 곳이라며 안심시키지만, 나는 아주머니들의 강인함 때문에 동조 형제의 말을 믿지 못한다. 

 
드디어 한라산 자락 첫 발을 뗀다. 해발 고도 600미터에서 시작한다. 세 남자는 어린 아이들처럼 들떠서 시끌벅적 떠들며 걷는다. 

 
나무 데크가 잘 되어 있다. 연두색으로 뒤덮힌 숲의 싱그러움에 흠뻑 취해서 걷는 건지 둥둥 떠가는 건지 모를 즐거움으로 충만하다. 관음사 입구에서 한라산 백록담까지 총 8.7km, 5시간 소요 예정이다. 그동안 제주에서 하루 평균 10km 정도 씩 걸었다. 그러나 그건 평지 아니었던가. 
 
평평한 평지 같은 숲길이 지나고 탐라계곡 육교를 건너자, 본격적인 계단이 시작된다. 위를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힌다. 

 
제주에 도착하자 마자 얼마 후 동조형제에게 전화가 왔다. 한라산 등반을 같이 하잖다. 오랫동안 한라산에 오르고 싶었지만 혼자서는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었다. 평소 산행을 잘하는 편도 아니고 체력도 좋지 못해서 걱정이 됐다. 최소 8시간에서 10시간 정도 소요되는 한라산을 과연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오케이 사인을 보내고 날짜도 잡았다. 그러나 점점 때가 가까울수록 걱정이 앞섰다. 매일 일기예보를 체크했다. 날씨가 흐리다. 오후 한 두어 시간 비도 올 것 같다. 취소하자고 할까, 3~4시간 정도 걷는 영실코스로 바꾸자고 할까. 염려가 밀려오고, 내내 걱정이 짓누른다. 왜 걱정하는 것일까?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중간에 실패할 것이 두려운가? 몸이 망가질 것이 두려운가? 이 나이에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 생각을 고쳐먹어야 한다. 방법이 있다. 마음속으로 마인트컨트롤을 한다. 지난해에 한 동료 분이 한라산 정상에 갔다 왔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그분과 함께 북한산을 간 적이 있었는데 나보다도 체력이 안 좋은 분이었다. 어라? 그 양반이 갔다고? 그럼 나도 할 수 있겠네! 이런 생각이 내게 긍정마인드를 갖게 한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탐라계곡부터 개미등을 지나 삼각봉 대피소까지 가는 3km 정도 구간은 경사가 심했다. 설상가상 비가 내린다. 불행한 생각들이 먹구름이 되어 마음 가득 채운다. 우비를 입고 다시 오르면서 초긍정 마인드를 갖기 위해 마음을 고쳐먹는다. 비가 내려도 괜찮다. 안개로 가득찬 한라산을 등정해도 괜찮다. 나는 오늘 참 좋은 두 사람과 함께 여기를 오르고 있다. 괜찮다. 괜찮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종훈 형제가 갑자기 체력이 떨어졌다. 염려가 됐다. 그때 동조 형제가 준비한 간식들과 에너지 충전 비상 양식을 꺼내준다. 신기하게도 종훈 형제가 서서히 소생한다. 경험자의 지혜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나도 몸이 가벼워진다. 잔뜩 겁을 먹었는데 아직까지 내 몸은 이상 무다. 무릎도 괜찮다. 고관절도 괜찮다. 심폐 기능도 잘 작동되고 있다. 심리적 여유도 생겼다. 그렇게 우리는 끌고 밀고 해서 오른다. 초등학생 두 남자아이가 어른도 없이 씩씩하게 오른다. 젊은 여성 홀로 천천히 오른다. 외국인 남자는 가벼운 백 하나 메고 뛰듯이 추월한다. 아빠와 아들도 오른다. 20대 젊은 청년들이 뒷산 오르듯이 가볍게 오른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나도 한 사람으로 오른다. 저마다 다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오르는 중이다. 그들의 경험과 도전은 귀할 것이다. 내 경험과 도전이 귀하듯이. 
 
나무로 뒤덮힌 숲 속 경관을 눈 여겨 보며 누릴 여유가 사라지고 우리는 헉헉대며 걷는다. 어느새 삼각봉 대피소에 도착한다. 빗방울이 굵어진다. 안에 들어가니 먼저 오른 사람들이 빽빽하게 자리에 앉아 간식을 먹는다. 우리도 바닥에 철퍼덕 앉아서 남은 간식을 또 꺼내 먹는다. 동조 형제가 너무 준비를 잘해줬다. 저거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평소에 절대 먹지 않던 것들을 하나둘씩 까먹을 때 얼마나 힘이 나던가. 

삼각봉 대피소

 
비가 그쳤다. 오늘은 미세먼지도 없다. 구름은 잔뜩 끼었지만 멀리 산등성이가 선명하게 눈에 보인다.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 정상 방향의 바위들이 절경이다. 연신 감탄사가 나온다. 뉴질랜드 남섬에서 많이 보던 절경들이다. 

 
용진각 현수교를 지날 때 멋진 한라산 풍광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사람들이 관음사 탐방로가 멋있다고 한 이유를 알겠다. 위를 봐도 멋있고,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는 제주시내 방향 풍광도 멋있다. 이제 마지막 구간이 남았다 왕관릉 구간이다. 급경사 계단이다. 한번에 오를 수 없다. 조금 오르다 쉬고 또 조금 오르기를 반복하며 체력을 안배하고, 무릎을 보호하며 오른다. 그나마 풍광이 너무 멋있어서 힘이 난다. 꼭 응원받는 기분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나는 핸드볼 대표선수였다. 경기도 대표가 되어 전국소년체전을 비롯한 전국대회에 여러 번 출전했다. 우승을 차지하고 학교로 돌아오는 날, 전교생이 운동장으로 나와 우리를 맞이했다. 학급의 내 자리로 돌아오니 내 책상 위에 편지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응원받는다는 게 뭔지, 그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나는 그때 알았던 것 같다. 한라산 정상 백록담을 받치고 있는 저 바위들이 계단을 힘들게 오르는 우리를 응원한다는 생각을 했다. 등산하는 내게 초긍정 마인드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부정적인 생각은 껴들 틈이 없다. 아직도 더 가야 하나? 아니다.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저들이 나를 응원한다. 
 
이제 진짜 마지막 구간이다. 

 
고사목들이 나타난다. 비는 완전히 그쳤다. 먹구름도 사라졌다. 멀리 제주시가 보인다. 멀리 성산일출봉도 선명하게 보인다. 그때 종훈 형제가 말한다. "이 맛에 등산을 하는구나" 이게 등산이다. 올라 오면서 힘든 구간을 지날 때 속으로 '내가 여길 왜 온다 했을까' 생각한다. 그러다가 정상 부근에서 시야가 넓어지며 저 아랫동네들이 작게 보이기 시작하면 '여기 오기 잘했다' 생각한다. 등산은 인생의 축소판이다. 오르락내리락한다. 기대했다 실망하기를 반복한다. 함께 떠들다가 홀로 침묵하기를 반복한다. 가쁜 호흡 속에서 후회했다가 환희하기를 반복한다. 혼자 힘으로 오를 수 없으니 수많은 도움을 받는다. 간식, 물, 스틱, 모자, 우비, 트랙킹화, 동료들... 그렇게 우리는 한라산 정상을 향해 마지막 힘을 다해 오른다. 
 
11시 40분 한라산 정상 도착. 4시간 20분 소요.

 
한라산 백록담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1947미터다. 2014년이었던가? 지리산 천황봉(1915미터)에 오른 적이 있다. 그보다 더 높은 산을 올랐다. 오래전부터 오고 싶었다. 이 높이에서 제주도 사방을 보고 싶었다. 그 꿈이 이루어졌다. 꿈을 이뤘는데, 지금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된다. 몸이 욱신거리는 걸 보니 현실이 맞는 것 같다. 
 
이제는 내려갈 시간이다. 올라온 것이 끝이 아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하는 마음은 잠깐이다. 내려가야 한다. 그래야 등산이 완성된다. 내려가는 길은 성판악 방향이다. 제주의 동쪽 방향을 바라보며 하산을 시작한다. 힘들게 올라오는 사람들에게 미소로 응원을 보낸다. 다 왔다, 힘 내시라. 

 
성판악 하산길은 정말 길고 지루하다. 데크길과 현무암 돌길이 번갈아가며 나타난다. 급경사도 없다. 절경도 없다. 한도끝도 없는 길고 긴 하산길이다. 성판악 방향 하산 길은 9.6km다. 관음사 방향보다 더 길다. 하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슬슬 무릎에 통증이 온다. 배도 고프다. 진달래밭 대피소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내려간다.  

 
진달래밭 대피소에 오니 보라색 진달래가 활짝 피어있다. 얼마전 서재석 대표님 블로그를 통해 올해 내가 진달래를 못 봤다는 사실을 깨닫고서는 살짝 아쉬움이 생긴 적이 있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진달래가 등장한 것이다. 수고했으니 여기 와서 쉬라는 듯했다. 

진달래밭 쉼터

 
쉼터에서 준비해온 김밥을 먹는다. 처음 매점에서 김밥을 볼 때는 세상에 저렇게 맛없는 김밥이라니, 하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허기지고 지치니 맛없는 게 있으랴. 동조 형제가 일일이 챙겨준 간식 남은 것을 꺼내 먹는다. 충분한 쉼을 취하고 다시 하산을 시작한다. 길고 긴 하산 길이다. 아직 한라산 등반은 끝난 게 아니다. 종훈 형제가 오른쪽 무릎에 이상이 생겼다. 덕분에 아주 천천히 함께 내려온다. 서둘러서 뛰듯이 내려왔으면 한 시간은 더 일찍 내려올 수도 있었겠지만, 천천히 내려오니 도리어 무픞에 무리가 가지 않았다.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빠른 게 다 좋은 건 아니다. 느린 게 다 나쁜 것도 아니다. 하산길은 느려서 도리어 좋았다.
 

 
오후 4시 성판악 하산 완료. 
 
기억을 더듬어 사진을 찾고, 하루를 시간별로 추적해보니, 내 기억 속에 등장하는 장면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 맞는 것 같다. 좋았다. 아주 좋았다. 오르는 과정도 좋았고 정상에서는 더없이 좋았다. 내려오는 길은 지루했지만 그 또한 좋았다. 함께 해서 더 좋았다. 두 형제의 장점이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것을 보자니 좋았다. 의지할 수 있어서 좋았다. 서로 챙겨주고 걱정해 주니 좋았다. 중년의 세 남자의 여행이 좋았다. 좋았기 때문에 그렇게 끝내는 것이 아쉬웠다. 다시 다른 미션을 함께 해보자고 마음을 모아 본다. '좋았다'는 말 외에 달리 표현할 수 없으니 좋다. 하나님께서도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매순간 그 마음을 'GOOD' ( טוֹב : 숩) '좋다' 라고 하시지 않으셨던가!
 
하루 동안 축소판 인생을 살았다. 아주 몹쓸 내 성격이 많이 개선 된 것을 보았다. 나는 원래 태어날 때부터 '부정과 의심의 인간'이었다. 그런데 오늘 나는 '초긍정과 신뢰의 인간'이 되었다. 일부러 그렇게 마음을 먹기도 했지만, 나도 인식하지 못하게 그렇게 말하고 행동했다. 나이 들어서 긍정 마인드가 형성된 것이 감사하고 좋았다. 일상에서도 그랬으면 좋겠다. 
 
등산의 끝은 몸의 노곤함을 풀어주는 사우나로!

산방산 탄산온천

 

"오늘 종훈, 동조 두 친구와 한라산을 올랐다. 참 좋았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