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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월 제주한달살기

[제주안식13] 좁고 작고 낮은 수준을 받아들이며

신의피리 2024. 4. 13. 21:33

낮부터 날씨가 맑아질 예정이다. 구름이 없다. 이제 금악오름에 오를 때가 왔다. 서둘러 버스 시간을 알아 본다. 12시다. 점심은 나가서 먹는다. 두모리사무소 앞에서 785번 간선버스를 탄다. 주말이라 운행 횟수가 적다. 이용객도 적다. 또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 이러다 버스회사 문 닫는 거 아닌가. 이렇게 승격이 적으면 적자 날 텐데... 

 

금악리에서 식사를 한다. 백종원 골목식당에 나왔다는 광고 때문인지 인근 3~4개 식당에 손님들이 가득이다. 이제 금악오름을 향해 걷는다. 이효리가 뮤직비디오를 찍어서 유명해졌다고 하나, 아래에서 보니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동네 뒷산 같은 느낌이다.

금악오름

 

금악오름에 가까이 다가가자 패러글라이딩이 보인다. 멋있다. 고개를 들고 연신 사진을 찍는다. 공중에서 여성의 비명소리가 아래 땅까지 들린다. 공포의 음성이 아니라 환호의 음성이다.  

금악오름 패러글라이딩

 

이번 생은 틀렸다. 나는 죽을 때까지 패러글라이딩을 타지 못탈 것이다. 스쿠버다이빙도 못할 것이다. 번지점프는 밑에서 구경만 할 것이다. 이건 믿음과 아무 상관이 없다. 어차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이까짓 거 못 탈까 하다가도, 가까이에서 쳐다만 봐도 오금이 저린다. 이건 타고난 육신과 성정의 문제다. 절대 믿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금악오름 정상에 오르니 사방으로 시야가 탁 트인 전망이 시원하다. 가운데 분화구도 있다. 모양이 아주 예쁘게 생겼다. 마음에도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나간다. 마침 그 순간 아내에게서 영상통화가 와서 멋진 장면을 공유해준다. 

금악오름

 

금악오름에서 내려와 저지문화예술마을까지 걷는다. 시골 밭길 사이로 걷는다. 5km야 이제 식은죽 먹기다. 시골 밭길을 걷다 여러 번 개를 만난다. 가까이 다가오니 소름이 돋는다. 나는 개가 무섭다. 나는 이렇게 태어났다. 어쩔 수 없다.

 

저지문화예술인 마을은 진짜 예술인 마을답다. 고급져 보이고, 건물마다 예술가들의 흔적이 보인다.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에 들어간다. 입장료가 2천 원이데, 아까운 마음이 든다. '물방울과 문자'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미술에 대한 나의 미개 수준의 감각이 부끄럽다.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겠고, 무슨 아름다움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물방울(이슬) 사진은 아름답기라도 한데, 도통 미술을 볼 줄 아는 눈이 없다. 2천이 아까울 정도로 금새 나온다.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그 어느 때보다도 피곤함이 몰려온다. 40여분 기다려 간선버스 785번을 탔다. 승객이 둘이다. 또 걱정이다. 

 

숙소 입구에 늘랑비 매니저 집사님께서 한경 양파를 좀 받아 둔 것이 있어서 자유롭게 가져가 먹으라고 두었다. 여기 한경은 양파밭이 많고 지금이 수확철이다. 몇 개를 집어 들고 들어왔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비비고 만두'를 올렸다. 그리고 양파를 썰어서 올린다. 세상에! 내가 지금까지 먹어본 양파 중에 가장 맛있다. 모양도 쌍둥이처럼 쌍양파다. 매일 반쪽씩 먹어도 좋을 것 같다. 아내에게 보내야겠다. 

한경 양파

 

해가 진다. 둥근 모양이 선명하게 보인다. 제주에 온지 13일 만에 가장 완벽한 일몰의 순간이다. 여전히 해는 바다 뒤로 넘어가지 못하지만, 언젠가 한 번쯤은 보겠지 싶다. 그래도 아름답다. 잠시 정신줄을 놓고 둥근 해가 바다와 구름 뒤로 서서히 내려가는 것을 본다. 살쩍 눈물이 났다. 김종필 답지 못한 일이다. 아마도 승효상의 "묵상" 때문인 것 같다. 건축가 승효상의 수도원 순례 보고서인 "묵상"은 읽을 맛, 볼 맛이 난다. 그는 스스로 개신교인이라 말한다. 그러나 매우 다원적이고 진보적이다. 시대와 사회의 문제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지식인들은 대개 그렇다. 보수신앙을 가지고 그렇게 문화예술인으로 사는 이들은 찾기 어렵다. 왜 그럴까? 우리가 배우고 믿는 개신교 보수 신앙은 이 한반도 땅의 역사의 질곡과 분단으로 인해 생긴 그늘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 땅의 언어를 잃었고, 이 땅의 구조적인 문제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도리어 이원론적인 그리스도인들만 양산된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다. 내 신앙의 좌표는 어디쯤일까 묻는다. 애매한 경계에 있다. 20대에도 그랬는데 50대가 된 지금도 그런 것 같다. 애매한 경계에 머물기를 좋아하는 이 성정은 타고난 것 같기도 하다. 어쩔 수 없다. 

카페온결에서 본 일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