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ent is Present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기고/양화진

욱여쌈을 당하여도

신의피리 2012. 4. 17. 10:47

100주년기념교회 교회소식지, <버들꽃나루사람들> 2012.4월호 부활절 칼럼.

 

욱여쌈을 당하여도

김종필

 

누구나 한 번쯤 통과하는 인생의 눈물 골짜기가 있다면 제겐 2011년도 고난주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고난주간 내내 눈물이 주야로 음식이 되었고, 앉고 누운 그 자리는 눈물 자국으로 얼룩지곤 했습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과 그로 인한 이별 때문이었습니다.

 

사순절 마지막 주간을 앞두고 비보가 날아들었습니다. 섬기던 청년부 리더 중에 3년 째 암투병중인 서른두 살 청년이 있었습니다. 고등부 때부터 보아온 참으로 신실하게 잘 자란 청년입니다. 그런데 첫 직장생활 도중 암이 발견되었고, 한 차례 수술 후 회복되는가 싶더니만, 고난주일을 앞두고 말기암 환우들이 머무는 샘물호스피스로 땅 위에서의 마지막 장막을 옮겼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설상가상,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고 하던가요. 고난주간 셋째 날 더 큰 비보가 날아들었습니다. 누님에게서 걸려 온 전화의 첫 마디는 날카로운 외마디 비명에 가까웠습니다. 며칠째 소화가 안 된다 하셔서 평생 병원신세 한 번 안 지신 아버지를 억지로 병원에 입원시킨 지 이틀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누님은 울부짖으며 말했습니다. “종필아, 아빠 위암 말기래. 간과 비장에도 다 전이됐대.”

가슴 언저리가 내내 무겁고 갑갑했습니다. 음식은 맛이 없어졌고,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쏟아졌고, 사랑하는 이들이 죽는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책과 영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헤아려보았던 죽음의 공포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여러 장례식장과 묘지에서 맡은 죽음의 냄새와도 달랐습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타자의 죽음이고 나와는 무관한 낯선 고통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제자와 사랑하는 아버지와의 죽음으로 인한 이별과 슬픔은 차원이 다른 깊은 고통이었습니다.

 

눈물의 고난주간이 지나고 부활절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기쁨은 희미할 뿐, 제겐 여전히 고난주간이었습니다. 예수승천일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승천과 재림에 대한 영광스런 기대도 잠시 잠깐일 뿐, 제겐 또다시 고난주간이었습니다. 성령강림절이 찾아와도 따스한 성령님은 잠잠하셨을 뿐, 제겐 줄곧 차가운 고난주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추수감사절이 지나고, 성탄절이 지나고, 새해도 지나고 또 다시 고난주간이 왔습니다. 그러나 제 몸의 감각은 지나간 고난주간의 슬픔과 두려움에 고착되어 매일 매일을 고난주간으로 기억하는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부활을 노래하는 것이 낯설고, 머리로 아는 것과 입으로 노래하는 것이 겉도는 느낌입니다. 죽음의 냄새는 여전히 코끝을 스치지만 부활의 영광은 흐릿하기만 합니다.

 

다시 맞이하는 부활을 긴 호흡으로 묵상하며 한 단어 한 단어 길어 올리다 보니 또 다시 죽음과 맞서게 됩니다. 갑자기 신비로운 기운에 휘감깁니다. ‘그래, 어쩌면 제대로 찾은 길인 지 모른다. 죽음 없이 어찌 부활에 이를 수 있으며, 아픔 없이 치유가 있겠는가. 고통과 상실 없는 회복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죽음의 공포를 이겨야 부활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지 않겠나. 예수님 역시 영광의 부활체를 덧입기 전 십자가 위에서 찢기고 상한 몸으로 고통을 견뎌내지 않으셨나.’

 

두 발은 여전히 땅에 딛고 있으나 다시 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듭니다. 감정은 아니라고 우길지라도, 경험은 힘겹다 아우성칠지라도, 겉사람은 낡아지고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할지라도, 사랑하는 이들과의 사별로 가슴 미어터진다 할지라도,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임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지나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써 부활에 이르러 희망의 새 문을 열어젖혔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우리 생에 가까이 있음이 새삼 감사합니다. 부활과 천국이 삶에 맞닿아 있는 엄연한 현실임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제자가, 사랑하는 아버님께서 육신의 눈을 감으며 우리의 손을 놓자마자 붙드신 것은 바로 부활하신 주님의 손일 터이니, 이 또한 그들이 남기고 간 선물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이제 죽음의 기억이 서려있는 일상의 곳곳에서 또 다시 눈물 골짜기를 만날지라도 부활의 소식을 붙들고 천국에 들어가기를 고대하며 이기렵니다. 그뿐 아니라 기나긴 1년의 고난주간을 갈무리하며 더욱 기나긴 영광의 부활절을 맞이하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