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ent is Present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책에서 만난 문장

욘 포세, 아침 그리고 저녁

신의피리 2024. 4. 15. 13:35

제주 도착 다음날부터 비가 왔다. 신창리에 있는 무명서점에 갔다가 그냥 나오기 민망해서 아무 책이나 골랐다. 소설을 읽고 싶었는데 얇았다. 저자가 누군지 몰랐는데 202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한다. 아침 그리고 저녁마다 감상에 젖곤 했는데 제목이 좋았다. 그래서 골랐다. 언듯 보면 이유 없어 보이지만 생각해 보면 다 이유는 있다. 어제 오후에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오늘 오전에 다 읽었다.

 

주인공 요하네스가 태어나던 순간, 그의 아버지의 시선은 그 탄생 순간에 머물러 있다. 그것이 '아침'이다. 이야기는 곧장 태어난 아기 요하네스의 죽음의 순간으로 이동한다.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는 요하네스가 죽음에 적응하는 과정을 그린다. 마침내 주인공은 자신의 죽음을 깨닫고 받아들인다. 먼저 죽은 친구 페테르가 요하네스를 죽은 자들이 가는 세계로 데려간다. 두 죽은 사람은 가야 할 곳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다. 곧 그곳에 가게 될 친구와 이미 그곳에 갔다가 친구를 데려가기 위해 마중 온 두 죽은 자가 대화를 나눈다.

어디로 가는데? 요한네스가 묻는다
아니 자네는 아직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구먼, 페테르가 말한다.
목적지가 없나? 요한네스가 말한다
없네, 우리가 가는 곳은 어떤 장소가 아니야 그래서 이름도 없지, 페테르가 말한다
위험한가? 요한네스가 묻는다
위험하지는 않아, 페테르가 말한다
위험하다는 것도 말 아닌가, 우리가 가는 곳에는 말이란 게 없다네, 페테르가 말한다
아픈가? 요한네스가 묻는다
우리가 가는 곳엔 몸이란 게 없다네, 그러니 아플 것도 없지, 페테르가 말한다
하지만 영혼은, 영혼은 아프지 않단 말인가? 요한네스가 묻는다
우리가 가는 그곳에는 너도 나도 없다네, 페테르가 말한다 
좋은가, 그곳은? 요한네스가 묻는다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어, 하지만 거대하고 고요하고 잔잔히 떨리며 빛이 나지, 환하기도 해, 하지만 이런 말은 별로 도움이 안 될 걸세, 페테르가 말한다


욘 포세, <아침 그리고 저녁> (131~132쪽)

 

저자는 가보지도 않은 곳을 묘사한다. 믿고 소망하는 바 아니겠는가,

 

그곳은 장소가 아니다.

그곳은 위험하지 않다.

그곳엔 말이 없다.

그곳엔 몸이 없다.

그곳엔 너도 나도 없다. 둘이지만 하나고, 하나이지만 둘이란다.

그곳은 우리 언어로 좋다 나쁘다 말할 수도 없다.

그곳엔 빛이 있을 뿐.

 

스캇, 펙이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이란 소설에서 묘사한 곳과 닮은 구석이 있다. 지식인들의 공통점인 것일까? 그래도 그냥 無라고 말하지 않아서 좀 다행이다. 욘 포세가 묘사한 죽은 자들이 가는 곳이 나는 좋은 곳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나는 죽는 것에 대해 점점 수용적이 되어 간다.  

 

욘 포세, <아침 그리고 저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