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ent is Present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렉시오 디비나

마태복음 27:56 / 막달라 마리아

신의피리 2024. 4. 28. 07:29
27:56 그들 가운데는 막달라 출신 마리아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있었다.

27: 61 거기 무덤 맞은편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앉아 있었다.

28:1 안식일이 지나고, 이레의 첫날 동틀 무렵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 갔다.

 

예수의 수난 이야기 끝 부분에 연거푸 한 여성이 등장한다. 막달라 출신 마리아. 막달라는 갈릴리 서쪽 중앙 마을이다. 그녀는 누구일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십자가 곁에 있었던 몇몇 여인들 중 한 명이다. 첫 번째로 이름이 등장한다. 아마도 예수의 남성 제자들은 그곳에 올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는 순간 모조리 체포되었을 것이니, 아주 멀리 숨어서 보고 있거나 아예 마가 요한의 어머니 집 다락방에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을 수도 있다. 여성들은 예외다. 20세 미만의 성인이 아니었던 요한도 예외다. 

 

예수께서 운명하시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안치되는 순간, 그때 그 장면을 지켜보던 이가 있었다. 그는 막달라 마리아다. 십자가 밑에 있었던 여인들이 무덤까지 따라 갔을 것이다. 

 

다음다음날 새벽, 막달라 마리아를 위시한 다른 여성들이 예수의 무덤에 갔다. 그들은 아마도 급히 무덤에 안치한 예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주기 위해 갔을 것이다.

마가복음 16: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전날은 안식일이니 갈 수 없어서 그다음 날 새벽 일찍 안식일이 끝나는 시점에 여인들이 무덤에 갔다. 그리고 그 새벽 부활하신 예수를 처음 목격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다. 제자들에게 달려가 예수의 부활하심을 알려준 최초의 증인이 막달라 마리아다. 

 

막달라 마리아는 누구일까? 그가 어떻게 그 자리까지 와 있었을까? 한 사람의 죽음의 순간, 무덤에 안치되는 순간, 그리고 부활의 순간을 목격할 수 있다는 것은 그녀가 얼마나 예수를 가까이 따랐는지를 보여준다. 그녀는 아마도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예수를 따랐을 것이다. 

마가복음 16: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마가복음은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연설명을 한다.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 그녀는 아주 독한 귀신에 들렸다가 예수를 만났다. 그 만남과 치유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으나 복음서의 여러 축귀 사건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께서 그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을 것이다. 그녀는 치유된 이후 예수와 일행들에게 수종 들었을 것이다. 은혜를 받은 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을 것이다. 

 

부활 이후 사도들의 이야기인 사도행전에 '막달라 마리아'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막달라 마리아의 위치는 매우 귀했을 것이다. 그녀의 역할과 영향은 매우 컸을 것이다. 그녀가 목격한 것들은 당시 엄청난 간증이 되었고 많은 이들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데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과 행적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수많은 가설과 소설들이 난무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경 기록이다. 그녀는 일곱 귀신 들렸다가 고침 받은 여성이라는 것. 그 이후로 (아마도) 줄곧 예수를 따랐을 것이고, 마침내 예수의 죽음, 안치, 부활의 목격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베드로를 포함한 나머지 제자들에게 예수의 부활하심을 알리라는 명령을 예수에게서 직접 받은 사람이었다. 

 

은혜를 입은 후, 한결같이 예수를 따랐던 여인, 그 끔찍한 십자가 폭력의 자리와 절망의 무덤 자리를 지켰던 여인, 그리하여 부활하신 예수를 처음으로 목격한 여인, 이 여인을 묵상해 본다. 그녀에게 임한 은혜와 그녀에게 부여된 사명과 그녀가 수행해 내야 할 남은 생애를 상상해 본다. 

 

많은 여성들이 은혜를 입고 사랑받는 자가 된다. 죄에서 자유함을 얻어 복음의 증인이 된다. 묵묵히 교회를 섬기는 일꾼이 되고, 열정적으로 사람들의 삶에 파고들어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된다. 내 어머니가 그런 분이셨다. 내 장모님이 그런 분이셨다. 내 아내가 교회의 딸이요, 은혜를 입은 자요,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살고 있다. 

 

주님, 거기 그 십자가와 무덤에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섬김과 사랑과 눈물과 감격을 헤아려봅니다. 우리 믿음의 어머니들을 헤아려봅니다. 그렇게 전해오는 믿음의 유산으로 인해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2020년 4월 13일 아침 말씀 묵상.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주인공 삼아서 묵상함.

 

4/13() “고립에서 연결로

<마가복음 16:1-8> : 부활의 증인,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

여성인 제게 말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 말에 귀 기울여 주시고, 신뢰의 눈으로 바라봐 주시고, 동등한 동료로 인정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소속감과 받아들여졌다는 안도감, 그리고 하나의 반짝이는 존재로 인정받고 있다는 이 느낌은 여기 아니면 그 어느 곳에서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직 이곳,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이 공동체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제가 선생님을 처음 만나게 된 것부터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남편을 잃은 후 깊은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저를 대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졌어요. 이웃을 돕고 싶어도 사람들은 저를 멀리했습니다. 아픈 사람들의 손을 잡고 함께 울어주고 싶었지만 저는 점점 고립되었습니다. 처음엔 어쩔 수 없는 운명적인 고립이었죠. 그렇지만 저는 이웃과 세상과 그리고 아름다움과 연결되고 싶었어요. 그러나 제가 더 나다워질수록 사람들은 저를 더 고립시켰습니다. 여자가 왜 그런데 나서는데. 저러니까 남편이 일찍 죽었지. 애도 못 낳은 걸 보면 저주받은 여자일 거야. 저는 점점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진짜 저주받은 인생이란 생각이 들었고요. 그렇다고 마음의 욕정을 따라 살고 싶진 않았어요.

그때 저희 마을에 그분이 찾아오셨지요. 아무도 제 말에 귀 기울여 주지 않을 때 그분은 귀를 활짝 열고 제 마음의 소리를 들어주셨어요. 아무도 제게 환대해주지 않을 때 그분은 제집에 오셔서 제 고통을 만져주셨어요. 저를 이해해주셨고,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가 전부가 아니란 걸 깨닫게 해주셨죠. 매일 밤 악령이 저를 눌러 잠을 이룰 수 없었는데, 그분이 제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해 주셨을 때, 이 세상에 저를 이해하고 알아주는 사람이 단 한사람이라도 있다는 사실에 저는 다시 살 소망이 생겼어요. 더이상 외롭지 않았고, 고립은 없었어요. 저는 그분의 말씀을 들었어요. 한 단어도 놓치지 않고 들었어요. 잊지 않으려고 되새기고 또 되새겼지요. 제게 남은 것이라곤 남편이 남겨둔 조금의 재산이 전부인데, 저는 그분을 위해서 정성껏 공궤했어요. 선생님이 마을을 떠나실 때, 저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생각했어요. 선생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그 나라엔 더이상 고립도 없고, 여자라서 소외되는 일도 없고, 과부라서 눈총받는 일도 없을 거라 믿었어요. 그러니 제가 제집에 남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이유가 없었어요. 선생님과 그분의 제자들을 따라나서기로 했지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분께서 마을을 다시니며 하나님나라를 전파할 때, 그 뒤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저는 가슴이 벅찼고, 많은 여인들에게 제가 변화된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날, 유월절 전날은 정말 무서운 날이었어요. 선생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성 밖으로 나오실 때, 제 가슴이 찢어졌지요. 제자들께서 곁에 계셨더라면 선생님이 좀 힘이 나셨을 텐데 아무도 없었어요. 저는 어차피 갈 데도 없었어요. 어차피 이미 7번도 더 죽었던 목숨이었으니 실은 죽는 것도 무섭진 않았어요. 다만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선생님을 멀찍이서 바라봐야만 한다는 것, 그 사실이 무서웠을 뿐이에요. 한번은 선생님을 따라가다 인파에 밀려 쓰러졌어요. 숨을 쉴 수가 없었어요. 그대로 죽을 것만 같았는데, 제 안에서 일어나라는 소리가 들렸어요. 아직 선생님은 살아계시고, 저는 그분의 죽는 데까지 따라가야만 했어요. 가지 않으면 안 되었어요. 홀로 고독하게 고립된 그 언덕에 그대로 둘 수 없었어요. 고립이 얼마나 무서운 건데, 지금 우리 선생님이 얼마나 외로우실까 생각하니 이렇게 엎드려 먼저 죽을 수는 없는 거였어요. 죽더라도 선생님 곁에서 죽으리라. 죽어야 한다면 거기가 내 무덤이 되리라.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하고 기도했지요. 주님, 주님은 거기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 안 돼요. 천사들을 시켜서 얼른 내려오세요. 그러실 수 있잖아요. 도대체 왜 그렇게 아무 반응도 하지 않으시고 순한 양처럼 돌아가시는 거예요? 왜 우리를 남겨두고 먼저 떠나시려는 거예요? 주님, 주님을 믿어요. 저를 찾아오신 이후로 저는 한 번도 주님을 의심한 적이 없어요. 선생님께서 전해주시고 가르쳐주신 그 나라는 반드시 올 거예요. 이게 끝은 아닐 거에요. 그러나 선생님 없는 이 세상에 무슨 소망이 있겠어요. 가시지 마세요.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듯이 훌훌 털고 내려오세요. 선생님은 강도들처럼 죽으실 분이 아니예요. 이렇게 저주의 나무 십자가에 달려 계실 분이 아니라구요!

제 간절한 기도와는 달리 선생님은 오후에 ‘다 이루었다’고 하시며 운명하셨어요. 다들 울기만 할뿐 어찌해야 할지 모를 때, 의회에서 은밀히 활동하시던 요셉께서 오셔서 당신의 무덤으로 선생님을 모시고 가셨어요. 저는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따라가서 무덤의 위치를 확인했어요.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요셉과 니고데모께서는 선생님 몸에 향품을 제대로 발라 주지도 못했어요. 두 분은 선생님의 몸을 삼베로 싼 후, 큰 돌을 굴려 무덤 입구를 막았어요. 이제 곧 안식일이 시작될 거에요. 날이 벌써 어두워졌고, 사람들은 모두 내려갔어요.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어요. 믿어지지 않았어요. 모든 게 꿈만 같았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다른 마리아 손을 잡고 우리 두 사람은 어떤 정신으로 돌아왔는지 모르겠어요. 길가에 무화과나무 잎사귀들이 무성했던 것만 생각이 나요. 다음날 안식일엔 종일 누워 있었어요. 제자들은 마가의 어머니 다락방에 모여 있었어요. 다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저는 시장에 내려가 향료를 샀지요. 선생님 몸에 향료를 제대로 발라 드리지 못했기 때문에 저는 내내 마음이 걸렸어요. 다음날 새벽 해가 뜨자마자 저는 두 여인과 함께 무작정 무덤으로 갔어요. 문제는 무덤 문에 있는 큰 돌을 어떻게 옮겨야 할지 몰랐는데, 가서 경비병들에게 사정할 생각이었지요.

저희가 무덤 앞에 도착했을 때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요. 돌문이 열려 있었거든요. 제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생각했어요. 서둘러 무덤 안으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앉아 있었는데, 너무 놀라서 향료를 떨어뜨릴 뻔했지요. 누군가가 선생님의 시신을 가져간 줄 알고 당황이 되었어요. 그때 청년이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어요. 놀라지 말라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는 살아나셨다고,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고, 빈 무덤을 보라고. 그리고 제게, 가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했어요. 선생님은 먼저 갈릴리로 가 계시니 거기로 오라고. 무서웠어요. 당연히 믿기지 않았지요. 저는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이 사실을 전부 알렸는데, 아시다시피 베드로 사도님과 거기 모여있었던 모든 사도님은 제 말을 믿지 않았어요. 그 누구라도 선생님이 부활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을 못했어요. 그때까지도 저희는 선생님께서 수차례 당신이 부활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지요. 나중에야 기억이 났을 뿐이예요. 베드로 사도님께서는 요한 사도님과 함께 무덤으로 뛰어가셨어요. 숨이 넘어갈 듯 힘들었지만, 저도 다시 무덤으로 올라갔어요. 두 사도님은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신 후 놀란 표정으로 되돌아 오고 계셨어요. 두 분이 되돌아가신 후 저는 혼자 무덤 앞에서 울고 있었지요. 도대체 누구 우리 선생님의 시신을 가져간 걸까. 혹시 어딘가 쓰레기더미에 버려진 것일까. 짐승들이....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도대체 어디 가신 것일까. 선생님, 선생님, 어디 가신 거예요. 아직 제가 해드려야 할 일이 있는데, 어디 가신 거예요. 그렇게 한창 울고 있을 때 누군가 제 뒤에서 ‘마리아야~’하고 부르더군요. 뒤를 돌아봤을 때 그분이 제 앞에 계셨어요. 그래요, 저는 한 번도 그분을 의심한 적이 없었어요.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어요.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어요. 그분은 죽음을 이기셨어요. 그분은 자신의 모든 가르침이 옳았다는 것을 입증하셨어요. 그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모두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거예요.

주님께서 왜 제일 먼저 제게 찾아오셨는지 저는 모릅니다. 저를 제일 많이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지 않아요. 우리 주님께서는 모두를 다 각자의 방식으로 제일 사랑하시죠. 저를 다른 사도님들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셔도 아니에요. 그분들이 하실 일은 저보다 훨씬 더 많으실 거예요. 제가 주님께서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힐 때까지 곁에 있었기 때문일까요?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저는 죽는 데까지 선생님 곁에 머물고 싶었을 뿐이에요. 제가 지옥 같은 고립에 빠져 있을 때 주님께서 찾아와 제 손을 잡아주시고 살려주셨어요. 그런데 어떻게 선생님께서 그 괴로운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데 홀로 둘 수 있겠어요? 제가 더 옳고 다른 분들이 틀렸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니에요.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이미 여러 분 죽었던 몸이었고, 그저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 그랬을 뿐이에요.

여성인 제게 말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가 어떻게 주님을 만나게 되었는지, 어떻게 주님을 따라다니게 되었는지 그건 아마 여러분 모두와 다르지 않을 거예요. 다만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고통받으실 때 제가 무엇을 보았고, 무덤 문을 열고 부활하셨을 때 제가 무엇을 들었는지, 그걸 제가 증언할 수 있어서 참 기뻐요. 이 일에 남자와 여자가 무슨 차별이 있겠어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데 남자와 여자가 무슨 구분이 필요하겠어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고립 속에 있던 제게 손 내밀며 영원한 사랑과 접속시켜주셨듯이, 우리 서로 사랑으로 손 내밀며 살아가요. 더러운 손, 병든 손, 죄로 물든 손, 탐욕의 손, 위선의 손, 우리 주님께서는 그 모든 손을 잡아 주셨어요. 제 안에 살아계신 주님께서 제게 연결의 손을 주셨어요. 우리 끝까지 그렇게 살아요.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