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ent is Present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세미한 소리를 듣다

고통에 의미가 있는가

신의피리 2024. 5. 2. 20:48

팔당물안개공원에서 양귀비를 보았다. 빨간 꽃잎 안에 검은 십자가가 선명하게 보인다. 이게 마약 성분이 있는 건지 아닌지 난 잘 모르겠다. 마약 성분이 있는 거라면 재배 금지 식물이다. 사람들 왕래가 잦은 공원 길가에 한 송이 피어 있다면 마약 성분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 

좀양귀비

 

지천에 들꽃이 널렸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진다. 형형색색의 들꽃 보는 재미가 있다. 산책이 부른다. 그러다가 오늘 우연히 양귀비를 보았다. 다른 꽃들에게 미안하지만 도드라지게 예뻤다. 양귀비는 매혹적인 만큼 치명적인 성분을 품고 있다. 그 부조화의 조화에 수긍이 간다.  

 

탱자나무

 

몇 주 전, 제주 곶자왈 숲을 걷다 탱자나무를 보았다. 연푸른 숲속에 하얀 솜같이 하얀 꽃이 나무 위에 걸려 있었다. 그런데 사진을 찍으려고 가까이 들여다보니 길고 뾰족한 가시들이 보인다. 벌과 나비의 무차별 공격을 대비하기 위한 것인가? 아름다움을 더 귀히 여겨야 한다는 창조의 섭리일까? 탱자나무 꽃과 가시의 묘한 부조화의 조화가 유독 시선을 사로잡는다. 

 

두어해 전에 뇌경색으로 쓰러졌던 친구가 이번엔 심장 때문에 응급실을 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심장에 스탠트 시술을 했는데 친구들의 연락과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친구에게 곧장 전화를 했다. 친구가 허허실실 웃다가가 갑자기 진지하게 묻는다. 내가 목사이기 때문에 더 절실하게 묻는 것이다. 자기 삶에 돌연 찾아온 연속된 고난의 이유가 궁금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고난이냐는 질문, 혹시 자신에게 무슨 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어떤 목적을 위한 과정인 것인지 궁금하다는 질문. 우리 교회 성도였다면 확신을 가지고 교과서적인 답을 해줬을 것이다. 욥의 예를 들었을 것이고, 지나치게 죄책감을 갖지 않도록 도왔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똑부러지게 말을 하지 못했다. 일부러 흐지부지 말한 것 같다. 일부러. 그러니까 그게 더 진리에 가까워 보일지 모른다는 직감이 있었다. 너무 말이 똑 부러지면 더 진리와는 어긋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모호하게 말하고 애둘러 회피하지 않았나 싶다. 그 친구는 선한 사람이다. 착한 사람이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줄 인물이 못된다. 책임감도 있다. 가정적이다. 성실하다. 충성스러운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친구에게 왜 갑자기 시련이 몰아치는가. 몸이 망가지고, 직장을 잃고, 가족 구성원들도 고통을 당한다. 하나를 감당하기도 힘든데 스트레스 지수가 큰 허리케인급 시련이 몰아친다. 심장스텐트 시술 한지 며칠 안돼, 오늘 요리를 하다가 감자깎는 칼로 손가락을 많이 배어 병원에 가는 길이라 하며, 내게 진지하게 묻는다. '하나님이 왜 내게 고통을 주시는가?' '이 고통엔 의미가 있는가?' 

 

양귀비와 탱자나무에서 본 그 묘한 부조화의 신비에서 고통의 의미를 유비적으로 알아듣는다. 그렇지만 말과 논리로 말하자니 두렵다. 단지 친구만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대체 내게 주어진 오늘의 이 고통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남에게 답을 말해줄 지식이 있지만, 말하기게 지친다. 그냥 살아내고 감내해야 할 모든 일에 다소 지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