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바람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책에서 만난 문장

양낙흥, 체험과 부흥의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

신의피리 2007. 7. 10.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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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 3학기, <현대교회사> 서평으로 썼던 글
책 전체를 서평한 것이 아니라 부분만 다룸


양낙흥,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을 읽고

1. 생애, 경건, 목회에서 인상 깊었던 점 한 가지씩

2. 그의 신학에서 한 가지 측면



생애 : 산책과 묵상

“당시 나는 많은 시간을 홀로 숲 속이나 한적한 장소들을 거닐면서 명상하고 독백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대화했다. 그럴 때면 나는 항상 예외 없이 나의 명상들을 노래로 표현하곤 했다.”(145) 조나단 에드워즈는 어린 시절부터 홀로 산책과 명상(묵상과 기도)이라는 방법을 통해 하나님을 체험하곤 했다. 숲 속을 산책하거나 허드슨 강변을 거닐며 그는 자연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의 신적 빛을 보았고 노래했으며, 그에 대한 반향으로 자신의 영혼 속에 빛나는 또 다른 신적 빛을 발견하곤 했다. ‘홀로, 걸으며, 기도하기’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아주 좋은 방법이었음을 그는 일찍부터 깨달았던 것이다.

홀로 걷기는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기도의 한 방법이다. 우리는 단독자로 서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늘 떼 지어 몰려다니길 좋아한다. 고독과 외로움을 구분하지 못하고 시끌벅적한 곳에서 사람의 말로 내면을 채워야 안전을 느끼기 때문이다. 또한 ‘걷는 것’은 마치 덜 진화된 인류의 행태처럼 되었거나, 아니면 단지 웰빙 라이프를 즐기기 위한 수단으로 취급되곤 한다. 기도는 전자악기들의 굉음이 있어야만 덩달아 춤을 추는 고성방가식의 부르짖음이 되었다. 그러기 때문에 현대인들의 영성이라는 것이 저 자연을 벗삼아 홀로 있으며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 걷고 또 걸으며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대화하는 것) 그렇게 해서 형성되고 고양된 영성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에드워즈의 영성이 영성의 거장들에 비할 때 최고봉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어릴 때부터 홀로, 걸으며, 묵상과 기도와 찬송을 통해 하나님을 배웠기 때문이리라. 그에 비할 때 홀로 있기를 견디기 힘들어 하고, 걷기에 게으르며 더불어 깊이 기도하지 못하고 있는 내 자신의 초라함이 새삼 크게 느껴진다. 내 영혼의 옷이 누더기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경건 : 죄에 대한 깨달음

“그는 자신의 죄성과 악함에 대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깊은 자각을 가지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아무런 특별한 결함을 찾을 수 없는 인물이 세상 어떤 사람보다 더 죄를 깊이 깨닫고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223)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신의 사악함을 ‘무한 위에 무한’을 쌓아 둔 것에 비유했다. 그가 그리 도덕적으로 큰 죄를 저지른 적도 없고, 오히려 늘 고결한 인품과 신앙을 겸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본성 안에 서려있는 죄에 대해 지나치리만큼 민감하게 반응한 듯하다. 그러나 그럴수록 오히려 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선물이 값진 법이 아닐까 싶다.

루터가 수도원에서 수행할 때 그는 마음속에 잠시 일렁이는 욕망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속죄의 기도를 드렸다. 무릎이 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는 거룩한 의를 추구했으며 죄를 미워했다. 이렇듯 죄에 대한 민감함이 있었기에 하나님은 그를 종교개혁의 기수로 삼으셨다고 볼 수 있다. 초기 한국의 부흥을 주도한 길선주 목사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부흥의 기적을 이끌어갈 수 있었던 것 역시 그들 안에 있는 죄에 대한 깨달음과 고백 때문이었음을 볼 때, 하나님의 부흥의 시발점은 바로 이 지점이라 할만하다.

윤동주의 시처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고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자신의 죄를 닦고 또 닦는 죄에 대한 각성에 치열하게 매어 달리는 이들이 드문 시대를 살고 있다. 오히려 욕망을 분출하도록 부추기고, 자아를 긍정하는 것이 더 정신위생상 좋다고 속삭이며,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값싸게 사고파는 교회가 우후죽순 늘어나는 시대에 직면하고 있다. 이 시대 한 가운데서 말씀을 맡은 사역자로 부름받은 나는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려 죄를 통회하는 것에 온 영혼을 쏟아 붓는 철저함이 있는 것일까? 거꾸로 슬며시 위장하는 기술에 능통하고 하나님께로 가야 할 영광을 중간에서 자꾸 가로채는 재미로 강단 위에 서는 것은 아닐까? 그런 자신을 적당히 뉘우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을 운명으로 삼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에드워즈조차 자신을 ‘지옥에서도 가장 낮은 자리에 있어야 할 자’로 여겼건만, 그리고 그것조차 남들보다 더 큰 죄에 대한 자각이 아니라고 했건만, 나의 교만의 ‘밑 없고 무한한 깊이’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듯싶다.


목회 : 정회원 제도와 성찬 논쟁

 “1750년 6월 22일,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가 해임되다”(576) 조나단 에드워즈는 40대 후반의 나이에 교인들로부터 해임되고 쫓겨났다. 그럴 수 있는 일일까? 그래도 되는 일일까? 우리 시대 교회라면 그런 일이 비일비재한 일이니 별 것 아닌 일일 수 있으나 부흥의 불꽃을 지폈던 에드워즈가, 탁월한 지성을 겸비한 신학자요 체험과 부흥의 목회자였던 에드워즈가 자신들의 교인들에 의해 쫓겨났다는 것이 말이 되는 일일까? 성찬의 참여할 수 있는 회원권 문제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수용되어 오던 것을 좀 더 분명하게 개혁하려던 에드워즈의 실패라고 규정하는 것이 과연 바른 판단일까? 그들을 쫓아낸 무리들은 얼마 전 대각성의 현장 속에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산실들 아닌가!

목회자가 성도들과 갈등이 없을 수는 없다. 영적 리더가 가르치고 인도해야 할 그들의 교인들과 마찰을 일으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 예컨대 모세나 바울조차도 늘 그들의 인생과 사역에 있어서 영적인 문제로 따르는 무리들과 갈등을 일으켰다. 그러니 에드워즈라고 해서 성도들과 갈등이 전혀 없었다고 말하면 그것이야말로 비정상적인 일일 것이다. 사역자가 목회를 하다보면 진리의 문제로 인해, 혹은 삶의 문제, 언어의 문제, 관계의 문제, 관점의 차이 문제 등으로 성도들과 부딪힐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결과가 파국으로 끝났다는 것은 갈등의 양 당사자 모두에게 문제가 있을 개연성이 높다. 갈등은 해결되고 해소되어야 비로소 생명이 되는 것이지, 파국과 결별은 모두를 울게 만드는 패-패의 게임이 되는 것이다.

사례문제, 권징문제, 인간관계 문제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동시에 에드워즈가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인물이 아니라 이 땅 위에서 살았던 인물임을 상기하게 해준다. 해임통보를 받은 후 한 고별 설교 역시 다소 실망스럽다. 해결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태도로서의 설교라고 보기 어렵다고 느꼈다. 다만 오늘날의 교회가 목사를 해임할 경우 그 끝이 추잡해지는 것에 비할 때, 에드워즈가 보여준 갈등을 풀어가는 과정은 단연 돋보이는 태도였다. 최선을 다해 토의하고, 결정을 하나님께 맡기고 수용한 것은 좋은 본보기가 된다.

‘진리에 있어서는 일치를, 그 외의 일에서는 다양함을’ 인정하며 때론 싸우고 때론 타협하는 사역의 묘미와 힘겨움을 에드워즈의 사례를 통해 다시금 되새겨 보게 된다.


신학 : 궁극적 부흥 철학, <종교적 정서>에 관하여

내게 있어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역사의 뒤 켠 이었다. 그러나 이 과제를 위해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을 접하는 동안 ‘그 위대한 신학자’는 어느새 내 역사의 중심부로 치고 들어왔다. 말씀의 사역자로 부름 받아 훈련받는 지금, 부흥과 대각성의 주역이었으며, 목회와 신학의 거봉으로 우뚝 솟아있는 영성과 지성을 겸비한 에드워즈를 외면하고 몰라본다는 것은 신학도로서 큰 불행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양낙흥 교수님께서 해설 및 정리하여 세세하게 풀어 놓은 <종교적 정서>를 읽는 과정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눈으로 글자를 식별하고 지성으로 글을 읽어낼 수 있다고 해서 그저 읽혀지는 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참된 회개의 표지와 거짓 회개의 표지를 구분한 그의 탁월한 분석력에 매 페이지마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고, 무엇보다도 그의 분석의 진술과정이 생생하게 활자를 살아 움직이게 하여 내 영혼의 상태를 점검하게 만들었다는 사실 앞에 두려움이 일렁거렸다.

나는 왜 이 부분을 읽으면서 두렵고 떨렸을까? 아마도 ‘거룩성’을 조롱하는 오염된 현대적 영성에 포로가 된 현대교회의 아들로 태어난 나의 누추함을 지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에드워즈가 내세운 참된 회심의 표지 앞에 한량없이 무너지고 마는 우리 시대의 교회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값싼 복음이 만연되어 보편화된 우리 교회 속으로 곧 뛰어 들어갈 것을 생각하자니 두렵고 떨리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책의 방대한 분량을 꼼꼼하게 살필 여력이 없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온 몸으로 읽어나가다가 영혼의 책갈피로 접어놓은 부분이 몇 군데 있었다. 그 부분들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내겐 크나큰 도전이 되리라 믿는다.


첫째, 환원주의의 오류를 극복함.

18세기는 이성의 시대였다.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이성이 모든 사물과 사태의 판단 주체로 등극했다. 그러므로 신앙의 영역에조차 이 절대잣대가 작동하게 된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정통주의 시대를 거치며 기독교신앙은 이성으로 계시를 이해하고, 말씀의 뜻을 해석하며, 구원의 비밀을 보는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러한 주장은 체험과 정서(감정)에 기대는 신앙을 낮은 차원으로 보고나 거짓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검증 불가능한 것이고 일관성이 없는 변화무쌍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모든 진리는 이성으로 수렴되고 이성으로 판단하는 것만이 참 진리가 된다는 이성 환원주의가 득세하게 되었다. 바로 이런 시대에 에드워즈의 <종교적 정서>가 등장했고, 그 책이 세상에 나오기 이전에 이미 정서를 동반한 부흥과 대각성이 불길처럼 번져나갔다는 것은 그 시대에 큰 반향을 일으키는 사건이 되기에 충분했다. 

반대의 환원주의도 있었다. 사실 대각성이 휘몰아치고 난 후 등장한 ‘체험에 몰입한 광신집단’이 에드워즈로 하여금 변증하게 하는 단초를 제공한 셈이었다. 그들은 오로지 진정한 회심은 반드시 체험이 있어야만 한다고, 아니 두드러진 체험이 동반하지 않은 회심은 참된 회심이 아니라고, 아니 체험만 있으면 된다고 하는 체험 환원주의의 오류에 빠지게 되었다. 바로 이 양극단이 자기들의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할 때, 에드워즈는 정서를 동반한 체험을 옹호하면서 반부흥주의자들에게 대답했고, 동시에 참된 회심의 표지와 거짓 회심의 표지를 날카롭게 분류하면서 극단적 광신집단의 오류를 밝혀내었다.

이런 입장은 참으로 모든 경우에 반드시 옳다. 인간은 지, 정, 의 측면이 공존하며 사람마다 각 측면의 경향성이 인지적 측면과 판단적 측면에서 모두 다르다는 것은 현대 심리학자들이 밝혀낸 공로이다. 그러니까 구원의 진행방식이 모두 똑같을 수 없고 그 순서와 정도에 있어서 지, 정, 의적 측면이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영적 이해도’가 지성적 이해의 측면이 먼저 작동하여 정서적 측면으로 나아가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정서적 측면에서 발동하여 이해의 측면으로 번지기도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다른 측면들을 제외하고 한쪽 측면만을 강조하는 것은 결코 옳은 인식이 될 수 없고 환원주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이런 영적 지형에서, 하나님 체험에 기초하여 늘 훨훨 타오르는 거룩한 정서에 휩싸인 매우 지성적이고 균형잡힌 신학자가 대각성의 불을 지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며 하나님의 은총이 아닐 수 없다.


둘째,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을 구분함.

회심의 체험에 있어서 사람마다 느끼는 정서는 모두 다르다. 어떤 정서들은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일 수 있고 어떤 정서들은 특수한 경우에만 나타나는 현상일 수 있다. 그런데 수많은 인간의 정서적 표현들 중 과연 어디까지가 회심을 확증하는 정서인지 구분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의 정서는 불완전한 것이다. 그 정서를 작동시키는 최초의 바람이 절대적인 성령의 사역에 근거한다면 그 때 일어나는 정서는 분명한 참된 회심의 표지이나, 절대적인 성령으로부터 불지 아니하고 그 외 인간의 내적 요소나 혹은 환경적 요소로 인해 정서가 일어났다면 아무리 비슷한 정서라 하더라도 그것은 참된 회심의 표지로 볼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회심을 경험했노라고 말하는 이의 고백으로 봐서는 그 정서가 참인 듯 하나 그의 삶을 봐서는 종교적 정서와 기독교적 실천의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로 인해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난제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마치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교인이 20% 된다고 하는데, 회심을 경험한 이들이 이렇게 많다면 어찌하여 우리 사회의 도덕성과 영적 상태가 이렇게 부패하고 초라한지 의구심을 만들게 하고, 그렇다면 과연 그 중에 가짜 신자가 얼마나 되며 또 그 기준은 무엇인지 생각할 때에 갖게 되는 어려움과 유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금 긋기 어려운 지점을 다루는 에드워즈의 논증을 살펴 볼 때 실로 감탄하게 되는 것은 그가 절대성과 상대성의 근원을 매우 잘 이해하고 분석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경험으로는 명백하게 절대적인 것으로 확증할 만한 것들도 그는 의심의 눈초리로 뒤집어보고 그 정서의 이면에서는 다른 원천에서 흘러나온 것일 수 있음을 통쾌하게 논증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예컨대, 다섯 번째 표지인 ‘성경 본문과 함께 어떤 종교적 정서가 생겨났다’는 것조차 그는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말 것을 권고한다. 성경의 오용도 흔하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 표지인 ‘사랑의 외양’도 모조품이 있을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고, 여덟 번째 표지인 ‘단계와 방법의 명료성’ 문제에 있어서도 ‘깨달음 다음에 위로’라는 필수적 두 단계 외에 단계를 세분화하여 절대화하는 것의 위험을 적시하고 있다. 즉 성령 사역의 신비성과 다양성을 측량하고 규범화하는 것의 오류를 지적한 것이다. 열한 번째인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은 어떤가? 에드워즈는 이 역시 근거가 되기에는 미약하다고 말한다. 소경 상태에 빠진 위선자들도 스스로 구원의 확실성을 표명하는 자신감에 빠져 있고 그조차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구원의 세례를 무슨 광고 찌라시 돌리듯이 값싸게 나눠주는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개교회주의 속에서 상호 경쟁적으로 교인 유치에 열을 올리는 때에 교인 수 늘리려고 정말 별의 별 짓을 다하는 시대에 목회자가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지닐까? 간단한 4영리식 복음을 소개한 후 온 마음이 담기지 않은 이에게 회원증 발부하듯 영접기도 시키고 이제 구원받았음을 선포하는 것에 익숙한 우리 교회에서, 에드워즈가 선별해 놓은 회심의 표지들을 보면 너무 높아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표지들을 명확하게 숙지하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할 것 같다. 회원수 하나 늘리기 위해 거짓 진리를 파는 일에 만에 하나라도 무지에 기인하여 동참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회심의 참된 표지로 인한 두려움.

에드워즈가 제시한 ‘참으로 은혜롭고 거룩한 정서들의 표지들’ 12가지 중 앞의 5가지 - 1)영적, 초자연적, 신적 영향과 그 작용, 2)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사랑, 3)하나님의 일들의 도덕적 탁월성의 사랑스러움, 4)신령한 지식, 5)확신 - 는 표지들이라기보다는 원천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다. 나머지 7가지 - 6)겸손, 7)성품의 변화, 8)온유, 유순, 화평, 용서, 자비, 9)부드러운 마음, 10)아름다운 대칭과 균형, 11)영적 욕구와 갈망, 12)기독교적 실천 - 가 진정한 의미의 참과 거짓을 나누는 시금석으로서의 표지라 할 수 있다.

나의 회심 사건을 돌이켜 보면, 아주 유치한 수준이긴 하지만 위의 표지들을 눈꼽만큼 씩은 가졌던 것 같다. 회심 전과 회심 이후의 나의 본성과 삶의 태도는 거의 180% 변화되었고, 그 변화의 방향과 내용은 에드워즈가 제시한 표지들과 얼추 흡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동시에 그 표지들이 지금도 성화의 과정 속에 있는 나에게 적절하게 정서적 표출로 나타나고 있는가 묻는다면 난감해지지 않을 수 없다. 거룩의 원천들이 여전히 내 삶의 뜨락에 쏟아져 내리고 있는가? 내 마음은 여전히 어둡고 차갑고 시들시들하기 때문에 영원한 '신적 빛‘의 내리쬠이 지속적으로 필요하지 않은가? 진리를 알 때 느끼는 짜릿한 미적 완전성, 즉 그 거룩함을 맛볼 때 느끼는 전율이 도대체 내게 얼마나 자주 일어나고 있는가? 그 외 나머지 표지들이 나에게서 나타나고 있는지 스스로 물으면 그저 두려움이라는 정서만 생길 뿐이다.


에드워즈의 참된 회심의 표지들을 보노라면 현재 성화를 추구하는 이들에게조차 그것은 너무나 높고 버거운 기준으로 읽혀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 표지들은 이미 자신에게서 열매로 나타나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겸손의 기준으로 볼 때 함량미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에드워즈가 제시한 기준이 회심의 표지라기보다는 성화의 표지라고 보는 것도 무방한 듯싶다. 칼빈이 제시한 회심의 기준과 비교해 보아도 에드워즈의 것은 정말 높고 엄격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종교적 정서>의 참된 표지들이 그 자체로서는 너무 높을지는 몰라도,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매우 적절한 표지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칼빈의 시대에는 가톨릭의 지나친 율법주의적 구원관이 만연된 시대였으므로 ‘칭의’의 본질적인 핵심 기준만으로도 충분했고, 그 기준은 그 시대에 적절한 표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에드워즈 시대는 칼빈의 시대와 다르고 칼빈 시대의 사람들과도 그 영적 수준과 형편이 달랐다. 오히려 칭의의 표지가 난무하고 왜곡되어, 비뚤어진 정서를 잣대로 구원의 유무를 판별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필요한 참된 회심의 표지는 칼빈의 것보다는 에드워즈의 것이 더 적절했다. 실로 참된 종교의 표지와 거짓된 종교의 표지는 칼로 명쾌하게 선을 그을 수 있는 지점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최소한의 기준(칼빈)과 최대한의 기준(에드워즈) 사이 어느 지점일 것 같다. 그 기준의 적실성을 갖게 되는 것은 바로 그 시대의 사람들의 상태일 것이다. 그러니까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면 그 기울기에 맞서 반대편 기울기로 기준을 제시하고, 또 그 반대로 사람들이 기울어져 있으면 이번엔 그 반대로 기울어진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현재 우리 한국 교회는 에드워즈의 기준이 더 필요하다는 판단이 든다. 한 때 율법주의적 경향이 짙게 드리우던 때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했었다. 율법과 종교적 행위가 마치 구원의 기준인 양 제시되던 때였음으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는 그저 은혜를 선포하는 것만으로도 괜찮았다. 그러나 성도의 집계는 많으나 성도가 포진해 있는 삶의 지형은 점점 더 형편없다면, 즉 성도라 불리우는 이들의 삶에 ‘겸손’과 ‘기독교적 실천’이 희귀하고, ‘영적 욕구의 갈망’은 완전히 메마른 듯 보인다면 참과 거짓을 다시금 새롭게 정리해 두는 것은 필요한 일이 될 것이다. 단, 그 출발은 양교수님께서 결론에서 제시한 대로 회심의 표지를 개인의 칭의에 적용하는 것에 앞서, 에드워즈의 회심의 기준을 우리의 성화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훨씬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우리의 신앙의 천박성이 심각하다는 반증이다.

시대와 교회의 미래가 어둡고 우리의 영적 목마름이 커져갈수록 조나단 에드워즈의 삶과 사상은 날로 더 빛을 발하는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