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바람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JP묵상/하나님나라큐티

아버지의 유산

신의피리 2018. 6. 8. 17:01

아버지의 유산

김종필 목사

 

내 부친께서는 위암 말기 선고를 받고 불과 40여 일 투병 후 74세에 별세(別世)하셨다. 구십은 사실 줄 알았는데, 처음 맞이한 병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황망하게 떠나신 것이다. 떠나신 분도 남는 가족도 갑작스러운 이별 때문에 우리는 마지막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그 마지막 며칠, 마음을 표현하는 데 서투른 우리 가족은 그 죄스러움을 표현할 길이 없어, 때론 침묵으로 때론 무덤덤한 일상이야기로 죽음의 기운을 견딜 뿐이었다. 목회자인 나는 부친의 죽음을 단 하루도 연장할 수 없는 무기력 때문에 더더욱 의기소침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 말씀도 남기지 않고 떠나신 부친의 빈자리에는 여러 감정들이 밀물처럼 밀려들어왔다. 제일 먼저 치고 들어온 파도는 그리움이었다. 식사를 못하시던 아버지는 마지막 며칠간 요거트만 드셨다. 작은 플라스틱 숟가락으로 요거트를 입에 떠드렸는데, 그 모습이 눈에 잊히질 않았다. 휴가철이 되면 부모님 모시고 산으로 바다로 다니던 여행 생각에 목이 메었다. 내 두 아이를 찍어주던 카메라, 어머니와 함께 마지막으로 갔던 겨울 여행 때 입었던 점퍼, 홀로 계실 때 즐겨 사용하시던 MP3플레이어, 부친의 부재가 느껴질 때마다 그 빈자리에는 어김없이 그리움만 쌓이고, 눈물의 파도만 쏟아졌다.

 

그리움의 파도가 치고 빠지면 다음엔 후회의 파도가 밀려들어왔다.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말씀 못 드린 게 후회가 되어 홀로 화장실 거울을 보며 수차례 가슴을 치고 또 칠뿐이었다. 전년도 아버님 생신 때 교회 행사가 있어 못 가본 게 천형(天刑)이 된 듯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기도와 간절함이 부족해서 병마를 이길 힘을 못 드린 것 같아 죄송한 마음 금할 길이 없어 울음만 더할 뿐이다. 말없이 떠난 부친의 빈자리에는 무기력한 못난 죄인만 남은 듯했다.

 

부친 사망신고를 하기 위해 관할 동사무소를 방문하여 신고를 마친 후 가족관계증명서를 받아 들었다. 부친 생의 ‘끝’을 받아 든 내 손이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인생은 참 신비스럽다. 하나님은 참으로 역설적이시다. ‘끝’을 끝으로 받아 든 그 순간, 새로운 ‘시작’이 비로소 시작되니 말이다. 그리움의 파도로 밀려들어온 그 감정은 소망의 파도로 뒤바뀌고, 후회의 파도로 밀려들어온 그 감정은 사랑의 파도로 승화가 된다. 어찌 된 일일까.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몸을 쓰러뜨리며 그것으로 인생을 끝내신 게 아니었다. 죽음에 빼앗긴 아버지의 몸은 천국을 향한 길이 되어 마지막 유산을 남기신 것이다. 어쩌면 그전엔 그저 관념이었고, 그저 낯간지러운 감정에 불과했을 ‘천국 소망’은 이제 분명한 실재가 되고 믿음이 되어 내 가슴으로 밀려들어온 것이다. 어쩌면 이 땅의 모든 부친의 몸은 죽음으로 소망을 사서, 마지막 유산으로 남겨놓는지도 모른다.

이제 천국에 가야 할 이유가 분명해졌다. 평생 한 번도 입 밖으로 내보지 못한 말, 거기서 아버지를 만나 기어야 말해야겠기 때문이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제 아버지가 되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 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