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바람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JP묵상/양화진

복면가왕

신의피리 2018. 6. 8. 17:09

21교구 소식지 4호. 2015/10/18


복면가왕

 

집에 TV 없이 산 지 17년째다. 결혼할 때 아내와 TV 없이 신혼 1년을 살아보자고 결심한 게 벌써 17년이 되었다. 지금이야 종종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세상에 들락날락 하니 심심할 날이 없지만, 신혼 초엔 어찌 지냈나 모르겠다. 어쨌든 목표는 이랬다. 소중한 저녁 시간에 TV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대신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는 게 우리의 바램이었다. 그 선택을 한 번도 후회해 본적이 없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종종 TV 타령을 한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테블릿 PC를 통해 일주일에 딱 한 번 온가족이 모여 ‘개그콘서트’를 본다. 아이들이 하도 하소연을 하다 보니, 시청하는 프로그램이 서너개 더 늘었다. 아이들은 ‘런닝맨’, ‘무한도전’을 보고, 아내는 ‘슈퍼맨 쌍둥이’를 가끔씩 보나보다. 실은 나도 최근에 즐겨 보는 프로그램이 두어 개 더 생겼다. ‘청춘FC 헝그리일레븐’과 ‘복면가왕’이다. ‘청춘FC’는 매번 볼 때마다 눈물이 핑 돌곤 한다. 실패, 소외, 탈락, 낙오…, 이런 단어들이 내 가슴 언저리를 꽉 메우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면 세상에나! 생면부지 모르는 그 TV 속 청춘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가 있다.

 

‘복면가왕’은 실시간으로는 못 보지만 뒤늦게 인터넷을 통해 챙겨보곤 한다. 우스꽝스러운 가면을 쓰고 노래하는 이들의 정체를 맞춰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실은 나는 단 한 명도 맞춰본 적이 없다. 노래도 대개 모르거니와 가수 역시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재미있다는 게 참 희한하다. 어차피 얼굴은 베일에 가려져있으니 ‘목소리’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외모에 대한 판단중지, 그거 참 좋다. 목소리의 톤과 색깔의 차이가 보인다. 잘한다 못한다보다는 잘하면 가수, 잘못하면 아마도 배우,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 편하다. 노래가 끝나고 승패가 가려지고 가면을 벗으면 놀라움과 환호 속에서 정체가 밝혀진다. 아주 오랜만에 방송에 나온 사람들도 여럿이다. 그때 그들의 짧은 멘트가 나는 참 좋다. 아주 행복해 보인다. 청중들은 가수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을 내려놓고 오로지 ‘목소리’만 귀 기울이고, 노래하는 이는 오로지 ‘목소리’만으로 청중에게 다가가게 되니, 그게 그리 기쁜 모양이다.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마음을 쏟아내고, 온몸에 퍼져있는 세포를 가동하여 그 목소리를 경청하는 그 공간, 실은 ‘그 공간’이 부럽다. 그 공간은 필연 누군가를 치유하기 마련이다. 보통은 목소리를 내는 이의 마음이렷다. 듣는 이의 마음에 공명을 일으킬 때도 있으렷다. 우리 공동체도 그 공간을 지향한다. 진심이 담긴 목소리가 하나둘 울려 퍼지고, 서로는 서로의 이야기에 최선으로 경청한다. 그들이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그들의 최선에 박수를 쳐준다. 가면을 벗고 서로의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진심으로 축하해준다.

 

복면가왕에서의 가면은 목소리에 집중하게 해준다. 그리고 복면이 벗겨지는 순간 편견은 깨진다. 우리도 ‘인격’이라는 가면을 쓰고 무대에 서곤 한다. 그러나 내면의 목소리로 말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가면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 속에서 울리는 소리를 듣는 법을 익혀야 한다. 그리고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 편견은 깨지고 우리는 사랑받고 사랑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