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바람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기고/하나님나라큐티

느리게 걸어야 보인다

신의피리 2018. 6. 8. 17:03

느리게 걸어야 보인다. 1

 

김종필 100주년기념교회 전임목사

 

집에서 교회까지의 거리가 1.5km입니다. 낮에 차를 써야 하는 일들이 많아 보통은 자가용으로 출근을 합니다. 출근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5분. 어느 날 차가 고장 나서 부득이하게 걸어서 출근하게 되었습니다. 걸으면 20분은 소요되는 거리입니다. 그날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왠지 거리가 낯설게 느껴집니다. 매일 수년을 지나다닌 길인데도 마치 남의 동네 온 것 같은 느낌입니다.

 

집집마다 담벼락 너머로 뻗어 나와 있는 감나무들이 정겹습니다. 낡아 보이는 어떤 빌라 앞마당에 예쁘게 가꾸어져 있는 작은 정원을 잠시 멈춰 서서 구경해 봅니다. 얼마 전에 부동산 간판을 분명 본 기억이 있는데 어느새 예쁜 카페로 변신한 곳도 있습니다. 건물마다 숨어 있는 조그만 주점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도 깜짝 놀랐습니다. 게다가 좁은 이차선 도로를 쌩쌩 지나가는 자동차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고 위험해 보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에 다양한 표정들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참 희한합니다. 차를 타고 다닐 때는 보이지 않았는데, 걸으니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거기에 있는 줄도 몰랐는데, 걸으니 보입니다.

 

목적지를 향해 빠르고 바쁘게 갔다,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빠르고 바쁘게 돌아오는 일이 반복되는 일상입니다. 목적만 생각하며 빠르고 바쁘게 가다 보니 지나쳐 버리는 것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목적지를 향해 가긴 가되, 느리게 걸으면서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가다보니 주변에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무의 변화가 보이고, 하늘 색깔의 미묘한 차이가 보입니다. 길가에 잡풀들이 비좁은 흙을 터전 삼아 생존을 위한 꽃피움에 미소를 짓게 됩니다. 무엇보다 사람의 표정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형형색깔의 다양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다양한 생김새와 외모를 저마다 뽐내며, 다양한 표정과 다양한 포즈를 취하며 걷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빠르게 달릴 때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보이니, 그 때 보았던 것들이 전부가 아니요, 진짜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걷다 보니 주님께서 이렇게 속삭이시는 듯합니다.

“빠르고 바쁘게 살다보면 정말 보아야 할 게 안 보인단다. 보이는 게 전부라 믿게 되면 애석하게도 자기가 본 걸 진리라 착각하게 되지. 안타깝지만 그 사람이 진리라 우기는 그 자리가 실은 지옥에 가까운 데, 그 중독에 빠지면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지. 그러니 나와 같이 천천히 걷자꾸나. 느리게 걸으면 사람의 결이 보이고, 생명의 흐름이 보이고, 네가 걸어가야 할 소명의 길이 보일거야. 나와 같이 느리게 걷자꾸나. 천국에서는 다 느리게 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