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바람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JP묵상/양화진

눈물로 드리는 새벽

신의피리 2015. 10. 27. 17:35

21교구 소식지 6호. 2015/11/01


눈물로 드리는 새벽

 

딱히 외로운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쓸쓸하다. 가을 탓이다. 10월에서 11월로 넘어가는 이 시간을 단 한 번도 그냥 지나친 적이 없다. 나뿐이랴! 이 계절의 고개를 넘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법이다. 곧 서른을 앞둔 스물아홉만 힘든 게 아니다. 인생의 불완전성 때문에 흔들리는 20대만 힘든 게 아니다. 중학교 졸업을 준비하는 우리 딸내미도 인생살이를 고달파한다. 마흔 중반을 지나고 있는 나도 쓸쓸한 정서가 겹겹이 쌓인다. 이 허전함을 어찌하랴!

 

적막한 새벽, 교회당 구석에 앉아 십자가를 응시한다. 위로부터 오는 소리는 없다.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잡소리들이 생각을 흩트려 놓는다. ‘한 말씀만 하소서. 갈증난 마음에 나직이 읊조려본다. “절 불쌍히 여겨주소서. 마뜩한 언어를 고를 수가 없어서 매번 주문 외듯이 반복한다. 십자가를 올려다보니 얼핏 근심에 쌓인 한 남자의 그늘진 얼굴이 보인다. ‘무엇 때문에 그리 무거운 얼굴이신가요?’ ‘네 얼굴 아니냐? 내 얼굴이기도 하니라.’ 공상 속에서 만든 내 언어인지, 내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인지, 주님의 음성이기를 바라며 지어낸 내 환청인지, 분간 할 수 없는 대화가 진행된다.

 

눈물이 마른 게 언제부터인가? 신학교 시절 새벽마다 눈물로 기도를 드렸다. 딱히 뭐가 슬퍼서도 아니고, 은혜에 벅찬 감동 때문만도 아니었다. 오랜 방황 끝에 드디어 제자리에 온 듯한 안도감이랄까? 더 이상 딴길로 가고 싶지 않은 마음에 어린 아이가 엄마에게 매달리듯 주님, 주님부르며 필사적으로 눈물로 매달리곤 했다. 그러다보면 나만 가련한 존재가 아니라, 내 가족도, 내가 섬기는 이들도, 내 교회도, 내 조국도 모두 주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가련한 존재들임에 가슴이 아팠다.

 

시간이 흐르고 나는 목사가 되었다. 그런데 도리어 눈물샘은 막혔다. “네가 맡고 있는 청년들 위해 언제 눈물 흘려 보았느냐?” 근심에 찬 십자가에서 주르륵 눈물이 흐르는 게 보인다. 나와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은 한결 같건만 그새 변한 건 나다. “결국 너도 변하는 거냐하시며 실망한 듯한 그분의 표정이 마음을 찌른다. 기근이다. 기갈이다.

 

최근 여기저기서 기도하는 이들의 언어 속에 하나님과의 독대라는 표현이 도드라진다. 쓸쓸할수록 더욱 어울리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홀로 길을 걸으며 하나님과 독대했던 바울처럼, 나도 그대들도 그분과 독대할 필요가 있다. 나를 위해, 그대들을 위해 눈물 흘릴 수 있는 감성이 필요하다. 아니 그건 감성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그분의 눈물이다. 그 눈물이 간절히 그립다. 이 가을에 되찾아야 할 내 소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