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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6.08 공동체
  2. 2018.06.08 K에게
  3. 2018.06.08 비교의식 내려놓기 (2)
  4. 2018.06.08 복면가왕
  5. 2015.10.27 눈물로 드리는 새벽 (2)

공동체

JP묵상/양화진 2018.06.08 17:50

21교구 소식지 마지막호. 2015/12/13


교구소식지 마지막호, ‘공동체’

 

지난 여름 지리산 종주를 하다가 불현 듯 ‘교구소식지’가 떠올랐다.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연결’에 대한 갈망이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고 싶은 욕구가 있다. 타인의 얼굴에서 나와의 공통점을 찾고, 그래서 안전을 느끼고 힘을 얻고 싶어 한다. 그 연결망을 설치하여 서로서로 잇대게 하고 싶은 마음이 첫 번째 이유였다. 두 번째는 ‘공동체’에 대한 갈망이다. 실은 이것은 첫 번째 갈망이 실현된 결론일 것이다. 다들 외딴섬처럼 따로따로 각자 자신만의 마을을 이루고 있는 12개의 구역이 실은 하나의 공동체였음을 어떻게 경험하게 할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으로 ‘교구소식지’가 발행되었다.

세 번째는 내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였다. 나는 21교구의 목사로서, 실은 21교구의 중앙연결통로이다. 내가 서로서로에게 다리를 놓아주어야 했다. 그 일환으로 매주 부족하지만 글을 쓰기로 한 것이다.

 

지나고 보니 참 잘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도 청년들의 다양한 생각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또한 훌륭한 구역장님들의 멋진 통찰이 담긴 글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하나님나라를 향한 이 믿음의 여정에 동행하는 동무들이 이리 많구나 싶어 마음 훈훈해질 때도 많았다. 올 한 해 내가 한 게 뭐 있나 계수하다보니 실은 마음에 쓸쓸한 바람이 부는 듯싶다. 그런데 ‘교구소식지’ 생각하니 그래도 잘 한 게 있구나 싶어 감사가 절로 나온다.

 

이 일은 도깨비 방망이가 만들지 않았다. 매주 귀한 시간과 재능을 쏟아 부어준 귀한 지체들이 있었다. 올린 자매와 진영 자매가 매주 번갈아가면서 지면 구성을 걱정하고 청탁을 했다. 그들의 수고가 아니면 교구소식지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청탁을 받고 글을 써준 지체들과 권찰들의 수고 또한 고맙다. 누구보다도 21교구 대표권찰로 1년 내내 막대한 희생과 섬김을 감당한 영아 자매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다 권찰을 하게 되었는데 하필 2101구역의 권찰이 되었고, 많은 권찰 중에 하필 대표권찰이 되어 무수히 많은 봉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유야 누구보다도 영아 자매가 잘 알 것이다! 영아 자매가 드린 그 많은 재능과 희생은 그 무엇으로도 환산되지 않을 만큼 고귀한 일이다. 내가 맛있는 식사 한 번 산다고 해도 갚아지지 않을 희생인 줄 안다. 하나님께서 기특히 여겨, 새해에는 평생의 동반자가 될 멋진 남자친구 한 명을 선물로 주시면 참 좋겠다.

 

어쩔 수 없이 이번호가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발행한 지 얼마 안됐는데 말이다. 한 일 년 정도 더 교구소식지를 만들고, 계속 청년들과 ‘글’로 소통하면 더 좋았겠거니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 안에는 많은 갈망이 있다. 무엇보다도 ‘공동체’를 향한 갈망이 사그라지지 않도록 하자. 하나님도 성부-성자-성령 공동체적으로 존재하신다. 그래서 세상 창조하실 때 남자-여자 공동체로 만드셨고, 예수님 승천하신 후 ‘교회’라는 공동체 남겨두셨다. 그러니 청년들이여, ‘공동체’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말라. 공동체 안에 머물 수만 있다면, 그 공동체는 여러분이 이 힘겨운 세상 꿋꿋이 걸어갈 수 있도록 힘과 소망이 되어 줄 것이다. 구역이 ‘공동체’로 변화할 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으로 연결되어 소통할 때, 바로 그 순간은 하나님나라가 잠시 현현하는 기적이 된다. 아직 새하늘과 새땅이 완성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 순간 그것을 맛볼 수 있게 된다. 그 순간처럼 우리 가슴 벅차게 하는 게 없음을 믿는다.

 

21교구 안에서 꼭 좋은 공동체 만들어 가시라.

 

21교구 김종필 목사

Posted by 신의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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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에게

JP묵상/양화진 2018.06.08 17:45

21교구 소식지 9호. 2015/12/06


K에게

 

K! 파르르 떨리는 입술, 그렁그렁한 네 눈물이 잊혀지지 않는구나. 얼마나 마음 아팠으면 꾹꾹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흐를까. 꼬옥 안아주고 싶었다만, 그러질 못해 내내 미안했구나. 생각해보니 나도 네 나이 때쯤이 인생 중 제일 아픈 순간이었지 싶다. 타인에게 내 진심 가 닿지 않고, 내 앞에 놓인 길의 방향은 흐릿하기만 하며, 서 있는 내 품세는 어정쩡하기만 하니, 그저 내 신세 처량하기만 했었지. 하나님께 젊음 바쳐 애써온 것의 대가가 이런 것인가 싶어 하소연만 나왔었고. 내 몰골이 이런데 내가 무슨 사람 섬긴다고 앞에 서 있을까 하는 자격지심만 한없이 커졌었지. 그래, 그래서 멋지게 잠적하고 싶은 충동이 참 많이 일어났었구나.


K! 네가 네 자신을 평가하는 게 전부가 아님을 알았으면 싶다. 내 눈엔 네가 귀했다. 내 눈엔 네가 실패자가 당연히 아니었지. 네 가슴 속에서 요동치는 ‘사랑에 관한 그 모든 감정들’은 그 누구, 그 무엇에 대한 사랑이든 결코 헛되이 허공으로 사라지지 않을거라 믿는다.


K! 네가 믿고 의지해왔던 ‘하나님은 베푸시는 분’이란다. 기꺼이 주시길 좋아하시는 분이시지. 그게 그분의 속성이야. 결코 네가 좋아하는 걸 빼앗는 분이 아니란다. 그걸 의심하지 않았으면 한다. 네 자신의 행복을 위한 거라면 네가 받을 준비가 될 때, 반드시 베풀어 주실거라 믿는다. 귀할수록 더 천천히 말이지. 그러니 오늘은 그만 울자꾸나. 장하다, 귀하고! 한 해 수고 많았다! 고맙고 사랑한다!  

Posted by 신의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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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교구 소식지 7호. 2015/11/08


비교의식 내려놓기

 

내 내면에 ‘비교의식’이라는 것이 언제 처음 태동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나보다 키가 한 뼘은 더 크고 좌우로 가늘게 찢어진 눈에 광대뼈가 심하게 튀어나온 ‘진표’라는 친구에게 은근한 열패감을 느끼곤 했었다. 목소리 큰 진표의 기세에 눌려 지내던 나는 어느날 그 친구를 바닥에 눕히고서는 배 위에 올라타 양 팔을 무릎으로 누르며 ‘항복해!’라며 소리 지른 기억이 있다. 내 힘이 더 셌고, 나는 승리감으로 우쭐거렸다. 그렇지만 내 인생 중에 그렇게 우쭐거린 순간은 많지 않았다. 움츠러든 순간이 백배는 더 많을 것이다. 매사 우월감의 순간을 지향했지만 대개는 열등감에 빠져 허우적대기 일쑤였다.

 

내면의 전쟁이 다 끝난 듯 보였던 신학교 시절, 나는 주목받는 학생이었다. 늦깎이 신학생이었기 때문에 동기들한테 형님 대접을 받았고, 지식과 경험을 나눠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어느날 나보다 예닐곱 살은 적은 동료가 수업시간에 멋지게 발표를 했는데, 그 친구는 우레와 같은 박수와 칭찬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그순간 정말 도깨비에 홀린 듯 이상한 일이 내 안에서 벌어졌다. 내 마음이 시궁창같이 되고 만 것이다. ‘나는 왜 저만큼 못할까?’, ‘나는 왜 매력이 없는가?’, ‘나는 사람들로부터 주목받지 못하는가?’ 말도 안되는 생각들이 마음속을 헤집어 놓았고, 이내 통제 불능상태가 되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재능과 능력 때문에 칭찬받는데 왜 내가 침울해지는 것일까? 그날의 경험은 그날로 끝이 나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정도는 덜했지만 마치 사울이 악신에 사로잡히듯 종종 그렇게 시달리곤 했다.

 

자기 안에 악신의 정체를 발견하고 그 악신과 싸우는 과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십여년이 넘었건만 내면의 영적 전쟁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악신이 잠시 난동을 부릴 수는 있어도 금세 제압하는 방법을 터득한 지는 꽤 되었다. 거룩한 꿈이라는 명목의 ‘비전’이라는 말은 실은 (목회)성공을 위한 야망의 다름 아닌 트릭이다. 야망이라는 악신은 때때로 ‘비전’이라는 가면을 쓰고, ‘부흥’이라는 이름의 우상을 숭배하도록 나를 유혹할 때가 있다. 비전과 부흥은 내가 쟁취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내 노력으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반드시 이행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긍휼로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 사실이 내 안에 비전, 부흥, 성공이라는 야망을 내려놓게 했다. 비교가 얼마나 무익한 일인지 깨닫게 한다. 이미 값없이 얻은 은혜에 주목하고 그 은혜에 머무는 일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지를 절감하게 된다. 도대체 비교한들 내 성숙을 위한 한줌의 도움이라도 되겠는가!

 

비교는 인생살이에 피할 수 없는 장애물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각각 자신의 길이 있고, 나도 나의 길이 따로 있다. 설령 세상이 일렬로 줄을 세워 평가를 할지라도 나에게는 나만의 길이 있다. 그러니 나보다 더 잘하는 이들을 보면 칭찬하면서 내게 없는 걸 찾아 배우면 된다. 또한 나는 나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되, 내게 주어진 그 모든 자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여기며 항상 겸손해야 한다. 어쩌면 신앙의 성숙은 자기 내면의 악신인 비교의식과의 싸움의 지난한 과정인지도 모른다. 

Posted by 신의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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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쁨이 2018.07.18 15: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습관이 답이다’ 라는 책을 검색하다 우연히 들어오게 되었는데 글을 다르쓰셔서 다른 글도 읽다갑니다. 비교의식에 대한 솔직한 글 잘 읽고 갑니다

복면가왕

JP묵상/양화진 2018.06.08 17:09

21교구 소식지 4호. 2015/10/18


복면가왕

 

집에 TV 없이 산 지 17년째다. 결혼할 때 아내와 TV 없이 신혼 1년을 살아보자고 결심한 게 벌써 17년이 되었다. 지금이야 종종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세상에 들락날락 하니 심심할 날이 없지만, 신혼 초엔 어찌 지냈나 모르겠다. 어쨌든 목표는 이랬다. 소중한 저녁 시간에 TV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대신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는 게 우리의 바램이었다. 그 선택을 한 번도 후회해 본적이 없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종종 TV 타령을 한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테블릿 PC를 통해 일주일에 딱 한 번 온가족이 모여 ‘개그콘서트’를 본다. 아이들이 하도 하소연을 하다 보니, 시청하는 프로그램이 서너개 더 늘었다. 아이들은 ‘런닝맨’, ‘무한도전’을 보고, 아내는 ‘슈퍼맨 쌍둥이’를 가끔씩 보나보다. 실은 나도 최근에 즐겨 보는 프로그램이 두어 개 더 생겼다. ‘청춘FC 헝그리일레븐’과 ‘복면가왕’이다. ‘청춘FC’는 매번 볼 때마다 눈물이 핑 돌곤 한다. 실패, 소외, 탈락, 낙오…, 이런 단어들이 내 가슴 언저리를 꽉 메우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면 세상에나! 생면부지 모르는 그 TV 속 청춘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가 있다.

 

‘복면가왕’은 실시간으로는 못 보지만 뒤늦게 인터넷을 통해 챙겨보곤 한다. 우스꽝스러운 가면을 쓰고 노래하는 이들의 정체를 맞춰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실은 나는 단 한 명도 맞춰본 적이 없다. 노래도 대개 모르거니와 가수 역시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재미있다는 게 참 희한하다. 어차피 얼굴은 베일에 가려져있으니 ‘목소리’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외모에 대한 판단중지, 그거 참 좋다. 목소리의 톤과 색깔의 차이가 보인다. 잘한다 못한다보다는 잘하면 가수, 잘못하면 아마도 배우,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 편하다. 노래가 끝나고 승패가 가려지고 가면을 벗으면 놀라움과 환호 속에서 정체가 밝혀진다. 아주 오랜만에 방송에 나온 사람들도 여럿이다. 그때 그들의 짧은 멘트가 나는 참 좋다. 아주 행복해 보인다. 청중들은 가수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을 내려놓고 오로지 ‘목소리’만 귀 기울이고, 노래하는 이는 오로지 ‘목소리’만으로 청중에게 다가가게 되니, 그게 그리 기쁜 모양이다.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마음을 쏟아내고, 온몸에 퍼져있는 세포를 가동하여 그 목소리를 경청하는 그 공간, 실은 ‘그 공간’이 부럽다. 그 공간은 필연 누군가를 치유하기 마련이다. 보통은 목소리를 내는 이의 마음이렷다. 듣는 이의 마음에 공명을 일으킬 때도 있으렷다. 우리 공동체도 그 공간을 지향한다. 진심이 담긴 목소리가 하나둘 울려 퍼지고, 서로는 서로의 이야기에 최선으로 경청한다. 그들이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그들의 최선에 박수를 쳐준다. 가면을 벗고 서로의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진심으로 축하해준다.

 

복면가왕에서의 가면은 목소리에 집중하게 해준다. 그리고 복면이 벗겨지는 순간 편견은 깨진다. 우리도 ‘인격’이라는 가면을 쓰고 무대에 서곤 한다. 그러나 내면의 목소리로 말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가면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 속에서 울리는 소리를 듣는 법을 익혀야 한다. 그리고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 편견은 깨지고 우리는 사랑받고 사랑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 

Posted by 신의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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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교구 소식지 6호. 2015/11/01


눈물로 드리는 새벽

 

딱히 외로운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쓸쓸하다. 가을 탓이다. 10월에서 11월로 넘어가는 이 시간을 단 한 번도 그냥 지나친 적이 없다. 나뿐이랴! 이 계절의 고개를 넘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법이다. 곧 서른을 앞둔 스물아홉만 힘든 게 아니다. 인생의 불완전성 때문에 흔들리는 20대만 힘든 게 아니다. 중학교 졸업을 준비하는 우리 딸내미도 인생살이를 고달파한다. 마흔 중반을 지나고 있는 나도 쓸쓸한 정서가 겹겹이 쌓인다. 이 허전함을 어찌하랴!

 

적막한 새벽, 교회당 구석에 앉아 십자가를 응시한다. 위로부터 오는 소리는 없다.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잡소리들이 생각을 흩트려 놓는다. ‘한 말씀만 하소서. 갈증난 마음에 나직이 읊조려본다. “절 불쌍히 여겨주소서. 마뜩한 언어를 고를 수가 없어서 매번 주문 외듯이 반복한다. 십자가를 올려다보니 얼핏 근심에 쌓인 한 남자의 그늘진 얼굴이 보인다. ‘무엇 때문에 그리 무거운 얼굴이신가요?’ ‘네 얼굴 아니냐? 내 얼굴이기도 하니라.’ 공상 속에서 만든 내 언어인지, 내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인지, 주님의 음성이기를 바라며 지어낸 내 환청인지, 분간 할 수 없는 대화가 진행된다.

 

눈물이 마른 게 언제부터인가? 신학교 시절 새벽마다 눈물로 기도를 드렸다. 딱히 뭐가 슬퍼서도 아니고, 은혜에 벅찬 감동 때문만도 아니었다. 오랜 방황 끝에 드디어 제자리에 온 듯한 안도감이랄까? 더 이상 딴길로 가고 싶지 않은 마음에 어린 아이가 엄마에게 매달리듯 주님, 주님부르며 필사적으로 눈물로 매달리곤 했다. 그러다보면 나만 가련한 존재가 아니라, 내 가족도, 내가 섬기는 이들도, 내 교회도, 내 조국도 모두 주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가련한 존재들임에 가슴이 아팠다.

 

시간이 흐르고 나는 목사가 되었다. 그런데 도리어 눈물샘은 막혔다. “네가 맡고 있는 청년들 위해 언제 눈물 흘려 보았느냐?” 근심에 찬 십자가에서 주르륵 눈물이 흐르는 게 보인다. 나와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은 한결 같건만 그새 변한 건 나다. “결국 너도 변하는 거냐하시며 실망한 듯한 그분의 표정이 마음을 찌른다. 기근이다. 기갈이다.

 

최근 여기저기서 기도하는 이들의 언어 속에 하나님과의 독대라는 표현이 도드라진다. 쓸쓸할수록 더욱 어울리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홀로 길을 걸으며 하나님과 독대했던 바울처럼, 나도 그대들도 그분과 독대할 필요가 있다. 나를 위해, 그대들을 위해 눈물 흘릴 수 있는 감성이 필요하다. 아니 그건 감성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그분의 눈물이다. 그 눈물이 간절히 그립다. 이 가을에 되찾아야 할 내 소명이다.

 

 

Posted by 신의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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