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바람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2018/06/08 9

공동체

21교구 소식지 마지막호. 2015/12/13 교구소식지 마지막호, ‘공동체’ 지난 여름 지리산 종주를 하다가 불현 듯 ‘교구소식지’가 떠올랐다.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연결’에 대한 갈망이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고 싶은 욕구가 있다. 타인의 얼굴에서 나와의 공통점을 찾고, 그래서 안전을 느끼고 힘을 얻고 싶어 한다. 그 연결망을 설치하여 서로서로 잇대게 하고 싶은 마음이 첫 번째 이유였다. 두 번째는 ‘공동체’에 대한 갈망이다. 실은 이것은 첫 번째 갈망이 실현된 결론일 것이다. 다들 외딴섬처럼 따로따로 각자 자신만의 마을을 이루고 있는 12개의 구역이 실은 하나의 공동체였음을 어떻게 경험하게 할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으로 ‘교구소식지’가 발행되었다. 세 번째는 내 자신의 정체성에..

기고/양화진 2018.06.08

K에게

21교구 소식지 9호. 2015/12/06 K에게 K! 파르르 떨리는 입술, 그렁그렁한 네 눈물이 잊혀지지 않는구나. 얼마나 마음 아팠으면 꾹꾹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흐를까. 꼬옥 안아주고 싶었다만, 그러질 못해 내내 미안했구나. 생각해보니 나도 네 나이 때쯤이 인생 중 제일 아픈 순간이었지 싶다. 타인에게 내 진심 가 닿지 않고, 내 앞에 놓인 길의 방향은 흐릿하기만 하며, 서 있는 내 품세는 어정쩡하기만 하니, 그저 내 신세 처량하기만 했었지. 하나님께 젊음 바쳐 애써온 것의 대가가 이런 것인가 싶어 하소연만 나왔었고. 내 몰골이 이런데 내가 무슨 사람 섬긴다고 앞에 서 있을까 하는 자격지심만 한없이 커졌었지. 그래, 그래서 멋지게 잠적하고 싶은 충동이 참 많이 일어났었구나. K! 네가 네 자신을 평..

기고/양화진 2018.06.08

비교의식 내려놓기

21교구 소식지 7호. 2015/11/08 비교의식 내려놓기 내 내면에 ‘비교의식’이라는 것이 언제 처음 태동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나보다 키가 한 뼘은 더 크고 좌우로 가늘게 찢어진 눈에 광대뼈가 심하게 튀어나온 ‘진표’라는 친구에게 은근한 열패감을 느끼곤 했었다. 목소리 큰 진표의 기세에 눌려 지내던 나는 어느날 그 친구를 바닥에 눕히고서는 배 위에 올라타 양 팔을 무릎으로 누르며 ‘항복해!’라며 소리 지른 기억이 있다. 내 힘이 더 셌고, 나는 승리감으로 우쭐거렸다. 그렇지만 내 인생 중에 그렇게 우쭐거린 순간은 많지 않았다. 움츠러든 순간이 백배는 더 많을 것이다. 매사 우월감의 순간을 지향했지만 대개는 열등감에 빠져 허우적대기 일쑤였다. 내면의 전쟁이 다 끝난 듯 보였던 신..

기고/양화진 2018.06.08

복면가왕

21교구 소식지 4호. 2015/10/18 복면가왕 집에 TV 없이 산 지 17년째다. 결혼할 때 아내와 TV 없이 신혼 1년을 살아보자고 결심한 게 벌써 17년이 되었다. 지금이야 종종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세상에 들락날락 하니 심심할 날이 없지만, 신혼 초엔 어찌 지냈나 모르겠다. 어쨌든 목표는 이랬다. 소중한 저녁 시간에 TV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대신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는 게 우리의 바램이었다. 그 선택을 한 번도 후회해 본적이 없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종종 TV 타령을 한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테블릿 PC를 통해 일주일에 딱 한 번 온가족이 모여 ‘개그콘서트’를 본다. 아이들이 하도 하소연을 하다 보니, 시청하는 프로그램이 서너개 더 늘었다. 아이들은 ‘런닝맨’, ‘무한도전’을 ..

기고/양화진 2018.06.08

그분의 자리, 그분의 마음

그분의 자리, 그분의 마음김종필 100주년기념교회 목사 어느 해 겨울 2박 3일의 피정(避靜)을 맞아 강원도 산골짜기에 있는 를 방문했다. 은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 도시인들이 침묵과 노동 속에서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기에 좋은 곳이다. 많은 이들의 오랜 기도가 흰 눈과 더불어 수북이 쌓여 있었던 까닭인 지, 예수원의 뜰을 밟는 것만으로도 세속의 때가 말끔히 씻기는 듯한 기분이었다. 삐걱대는 마룻바닥에 방석을 깔고 살포시 무릎을 꿇으면 침묵을 깨는 순명(順命)의 기도가 흘러나오고, 성경을 펼치면 주목하는 활자마다 마치 돋보기를 통해 보이듯 또렷하고 굵은 문자로 도드라지게 보인다. 추위에 얼어붙은 딱딱한 산길을 따라 오롯이 걷다 보니 성령님께서 중요한 미션을 막 귀띔해 주실 것 같은 거룩한 신비감에 휩..

내 발에 등, 내 길의 빛

내 발에 등, 내 길의 빛100주년기념교회 김종필목사 또 한 해가 저물어간다. 화사했던 봄, 짙푸르렀던 여름, 고즈넉한 가을을 지나 쓸쓸한 겨울을 또다시 맞는다. 한 해의 끝자락에 이르니 자연스럽게 걸어온 길을 반추하게 된다. ‘지금의 내 모습은 일 년 전 내가 꿈꿔왔던 그 모습일까?’, ‘지금의 내 삶은 젊은 날에 내가 꿈꿔왔던 그 미래였을까?’ 그렇지 않다. 내 계획은 처음보다 많이 빗나갔다. 내 계획대로 된 것이 별로 없다. 몸무게는 줄지 않았고, 관계는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고, 믿음은 생각만큼 진보하지도 성숙해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래도 괜찮다. 여전히 주님과의 소통이 끊어지지 않았고, 되돌아올 말씀의 자리가 있으니, 이 정도면 최악은 아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

느리게 걸어야 보인다

느리게 걸어야 보인다. 1 김종필 100주년기념교회 전임목사 집에서 교회까지의 거리가 1.5km입니다. 낮에 차를 써야 하는 일들이 많아 보통은 자가용으로 출근을 합니다. 출근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5분. 어느 날 차가 고장 나서 부득이하게 걸어서 출근하게 되었습니다. 걸으면 20분은 소요되는 거리입니다. 그날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왠지 거리가 낯설게 느껴집니다. 매일 수년을 지나다닌 길인데도 마치 남의 동네 온 것 같은 느낌입니다. 집집마다 담벼락 너머로 뻗어 나와 있는 감나무들이 정겹습니다. 낡아 보이는 어떤 빌라 앞마당에 예쁘게 가꾸어져 있는 작은 정원을 잠시 멈춰 서서 구경해 봅니다. 얼마 전에 부동산 간판을 분명 본 기억이 있는데 어느새 예쁜 카페로 변신한 곳도 있습니다...

아버지의 유산

아버지의 유산김종필 목사 내 부친께서는 위암 말기 선고를 받고 불과 40여 일 투병 후 74세에 별세(別世)하셨다. 구십은 사실 줄 알았는데, 처음 맞이한 병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황망하게 떠나신 것이다. 떠나신 분도 남는 가족도 갑작스러운 이별 때문에 우리는 마지막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그 마지막 며칠, 마음을 표현하는 데 서투른 우리 가족은 그 죄스러움을 표현할 길이 없어, 때론 침묵으로 때론 무덤덤한 일상이야기로 죽음의 기운을 견딜 뿐이었다. 목회자인 나는 부친의 죽음을 단 하루도 연장할 수 없는 무기력 때문에 더더욱 의기소침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 말씀도 남기지 않고 떠나신 부친의 빈자리에는 여러 감정들이 밀물처럼 밀려들어왔다. 제일 먼저 치고 들어온 파도는 그리움이었다. 식사를 못하시..

바쁜 목사, 나쁜 목사

바쁜 목사, 나쁜 목사김종필 목사 읽고 있던 책이, 낮에 만나 커피 한 잔을 나눈 지인이, 어제 본 영화가, 하다못해 아침 식탁에서 부스스한 얼굴로 아이가 던진 질문이, 한 가지 이야기를 건네올 때가 있다. 때로 성령님은 이렇게 말을 걸어오신다. 얼마 전 책을 읽다가 화들짝 놀란 적이 있다. 교실에서 정신줄 놓고 딴 짓하다 선생님에게 걸려 등짝을 한 대 맞은 것같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유진 피터슨이 쓴 『목회자의 영성』이라는 책 35쪽을 읽는 중이었다. “목사 앞에 붙는 ‘바쁘다’라는 형용사는 마치 ‘간음하는’ 아내나 ‘횡령하는’ 은행가라는 말처럼 우리 귀에 들려야 한다. 그것은 터무니없는 스캔들이고 신성모독적인 모욕이다.” 나는 이 문장을 눈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귀로도 들었다. 이는 바쁜 일과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