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바람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기고/하나님나라큐티

그분의 자리, 그분의 마음

신의피리 2018. 6. 8. 17:05

그분의 자리, 그분의 마음

김종필 100주년기념교회 목사

 

어느 해 겨울 2박 3일의 피정(避靜)을 맞아 강원도 산골짜기에 있는 <예수원 공동체>를 방문했다. <예수원>은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 도시인들이 침묵과 노동 속에서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기에 좋은 곳이다. 많은 이들의 오랜 기도가 흰 눈과 더불어 수북이 쌓여 있었던 까닭인 지, 예수원의 뜰을 밟는 것만으로도 세속의 때가 말끔히 씻기는 듯한 기분이었다.

 

삐걱대는 마룻바닥에 방석을 깔고 살포시 무릎을 꿇으면 침묵을 깨는 순명(順命)의 기도가 흘러나오고, 성경을 펼치면 주목하는 활자마다 마치 돋보기를 통해 보이듯 또렷하고 굵은 문자로 도드라지게 보인다. 추위에 얼어붙은 딱딱한 산길을 따라 오롯이 걷다 보니 성령님께서 중요한 미션을 막 귀띔해 주실 것 같은 거룩한 신비감에 휩싸인다. 이런 경험만으로도 피정은 중요하고 필요하다. 피정은 말을 버리고 말씀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다. 피정은 성취를 향한 욕망과 두려움을 내려놓고 지금 여기 성령님 안에 머무름이 주는 위대함에 몰입하는 공간이다.

 

2박 3일간의 짧은 피정의 은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찾아왔다. 저녁 종이 울리니 밥상 공동체가 꾸려진다.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이고, 봉사자들은 분주하게 간소한 식탁을 준비한다.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소박한 밥상이 주는 은혜에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나니, 마주 앉은 한 지체가 묻는다.

“형제님,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 줄 아세요?”

“아니요, 전혀 모릅니다.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요?”

“대천덕 신부님이 생전에 늘 그 자리에 앉아서 식사하시던 자리예요.”

 

그 순간 뭔가 감각과 심령의 빠른 변화가 감지됐다. 앞에서 분주하게 식탁을 차리던 봉사자들의 수고가 남다르게 보인다. 밥상의 값어치는 돈으로 매길 수 없는 은혜란 생각에 목이 멘다. 이곳 산골짜기에서 드린 조촐한 기도와 소박한 나눔이 결코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 이 조국 교회에 무언가 기여하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그 자리, 평생 대천덕 신부님이 앉아서 식사하던 그 자리에 앉으니, 조국교회를 향해 기도하던 그분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된다. 누군가의 일상의 자리, 누군가의 고된 눈물의 자리, 누군가의 밥상의 자리에 앉아보면 그의 마음과 내 마음이 연결된다. 누군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의 기도의 자리, 그의 일상의 자리, 그의 눈물의 자리에 앉아 보는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또한 예수님의 일상의 자리, 눈물의 자리, 밥상의 자리에 앉아 보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분의 사랑의 마음을 품고자 한다면 스스로 종이 되어 자기를 비워 십자가 지신, 그 눈물의 자리에 앉아보시길 바란다. 십자가를 져 보면 그분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될 것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_빌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