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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설교를 마치고 자리에 앉자마자 자괴감이 들었다.

"영혼이 느껴지지 않았어."

 

불현듯 그 상황 속에서 개그콘서트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꺾기도. - 모든 상황 속에서 뜬금없이 꺾어 공황 상태에 빠트리는 기술.

 

김준호가 제자들의 다람쥐를 호되게 질책하며 말한다.

"너희들의 다람쥐에는 영혼이 느껴지지 않는다..."

 

얼마전 첫 주례를 준비하면서 매뉴얼을 살피다가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결혼 서약 순서 중 서약문 낭독에 대해 이렇게 써있다.

"읽지 말고 서약하라."

 

신랑 신부가 하는 서약에도 영혼이 느껴지는 서약이 있고 그렇지 않은 서약이 있다.

개그맨들의 연기에도 영혼이 느껴지는 연기가 있고 그렇지 않은 연기가 있다.

설교에도 영혼이 느껴지는 설교가 있고, 그렇지 않은 설교가 있다.

 

복음을 말하고, 사랑을 말하고, 용서를 말하고, 십자가를 말하고, 하나님을 말하고 싶다.

다른 건 다 부수적인 이야기일뿐.

내 영혼 속에 복음이 숨쉬고, 사랑이 피어오르고, 용서를 결단하고, 십자가를 꽂고, 하나님이 들어오시면,

내 영혼의 생기가 돌고, 영혼이 느껴지는 설교자로 쓰임 받을 수도 있다.

 

자괴감은 더 기도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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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의피리 2012/04/27 18:16

100주년기념교회 교회소식지, <버들꽃나루사람들> 2012.4월호 부활절 칼럼.

 

욱여쌈을 당하여도

김종필

 

누구나 한 번쯤 통과하는 인생의 눈물 골짜기가 있다면 제겐 2011년도 고난주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고난주간 내내 눈물이 주야로 음식이 되었고, 앉고 누운 그 자리는 눈물 자국으로 얼룩지곤 했습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과 그로 인한 이별 때문이었습니다.

 

사순절 마지막 주간을 앞두고 비보가 날아들었습니다. 섬기던 청년부 리더 중에 3년 째 암투병중인 서른두 살 청년이 있었습니다. 고등부 때부터 보아온 참으로 신실하게 잘 자란 청년입니다. 그런데 첫 직장생활 도중 암이 발견되었고, 한 차례 수술 후 회복되는가 싶더니만, 고난주일을 앞두고 말기암 환우들이 머무는 샘물호스피스로 땅 위에서의 마지막 장막을 옮겼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설상가상,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고 하던가요. 고난주간 셋째 날 더 큰 비보가 날아들었습니다. 누님에게서 걸려 온 전화의 첫 마디는 날카로운 외마디 비명에 가까웠습니다. 며칠째 소화가 안 된다 하셔서 평생 병원신세 한 번 안 지신 아버지를 억지로 병원에 입원시킨 지 이틀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누님은 울부짖으며 말했습니다. “종필아, 아빠 위암 말기래. 간과 비장에도 다 전이됐대.”

가슴 언저리가 내내 무겁고 갑갑했습니다. 음식은 맛이 없어졌고,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쏟아졌고, 사랑하는 이들이 죽는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책과 영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헤아려보았던 죽음의 공포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여러 장례식장과 묘지에서 맡은 죽음의 냄새와도 달랐습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타자의 죽음이고 나와는 무관한 낯선 고통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제자와 사랑하는 아버지와의 죽음으로 인한 이별과 슬픔은 차원이 다른 깊은 고통이었습니다.

 

눈물의 고난주간이 지나고 부활절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기쁨은 희미할 뿐, 제겐 여전히 고난주간이었습니다. 예수승천일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승천과 재림에 대한 영광스런 기대도 잠시 잠깐일 뿐, 제겐 또다시 고난주간이었습니다. 성령강림절이 찾아와도 따스한 성령님은 잠잠하셨을 뿐, 제겐 줄곧 차가운 고난주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추수감사절이 지나고, 성탄절이 지나고, 새해도 지나고 또 다시 고난주간이 왔습니다. 그러나 제 몸의 감각은 지나간 고난주간의 슬픔과 두려움에 고착되어 매일 매일을 고난주간으로 기억하는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부활을 노래하는 것이 낯설고, 머리로 아는 것과 입으로 노래하는 것이 겉도는 느낌입니다. 죽음의 냄새는 여전히 코끝을 스치지만 부활의 영광은 흐릿하기만 합니다.

 

다시 맞이하는 부활을 긴 호흡으로 묵상하며 한 단어 한 단어 길어 올리다 보니 또 다시 죽음과 맞서게 됩니다. 갑자기 신비로운 기운에 휘감깁니다. ‘그래, 어쩌면 제대로 찾은 길인 지 모른다. 죽음 없이 어찌 부활에 이를 수 있으며, 아픔 없이 치유가 있겠는가. 고통과 상실 없는 회복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죽음의 공포를 이겨야 부활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지 않겠나. 예수님 역시 영광의 부활체를 덧입기 전 십자가 위에서 찢기고 상한 몸으로 고통을 견뎌내지 않으셨나.’

 

두 발은 여전히 땅에 딛고 있으나 다시 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듭니다. 감정은 아니라고 우길지라도, 경험은 힘겹다 아우성칠지라도, 겉사람은 낡아지고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할지라도, 사랑하는 이들과의 사별로 가슴 미어터진다 할지라도,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임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지나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써 부활에 이르러 희망의 새 문을 열어젖혔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우리 생에 가까이 있음이 새삼 감사합니다. 부활과 천국이 삶에 맞닿아 있는 엄연한 현실임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제자가, 사랑하는 아버님께서 육신의 눈을 감으며 우리의 손을 놓자마자 붙드신 것은 바로 부활하신 주님의 손일 터이니, 이 또한 그들이 남기고 간 선물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이제 죽음의 기억이 서려있는 일상의 곳곳에서 또 다시 눈물 골짜기를 만날지라도 부활의 소식을 붙들고 천국에 들어가기를 고대하며 이기렵니다. 그뿐 아니라 기나긴 1년의 고난주간을 갈무리하며 더욱 기나긴 영광의 부활절을 맞이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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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의피리 2012/04/17 10:47

 




새교회, 새자리, 새책상
어떻게 자리를 꾸밀까 고민끝에 주석을 좌우에 꽂아두기로 했다.
사실 여기서 나는 설교 할 일이 별로 없다.
수요설교 1년 1회, 새벽설교 1달 1회, 금요기도회 1년 2회, 2030예배 3개월 1회.
도합 16회! 그리고 심방할 때마다 5분여 정도 설교를 할뿐이다.
책상에 앉아 전화를 하고, 행정문서에 기입하고, 각종 회의에 참석하고, 이런저런 일에 몸으로 봉사한다.
나는 누구인가?
자칫 교회일을 회사일하듯 성과위주의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물론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내 자신을 목회자, 그것도 '설교'를 매개로 성도를 섬기고,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로 규정하고 싶다. 아니 좀 더 좁혀서 나는 설교자이기를 원한다. 설교를 준비할 때가 가장 힘겹지만, 또한 설교를 할 때가 가장 영광스럽고, 설교를 할 때 가장 내 자신이 귀하게 느껴진다. 나는 설교자이기를 원한다.
그래서 일부러 일 년 중 못 볼 책이 수두룩하겠지만, 각종 주석서들을 내 사방에 꽂아두었다.
말씀을 맡아 교회를 섬기라고 부름받은 자기 정체성을 잊지 않기 위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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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의피리 2012/02/19 10:52

-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눈이 내리면 100주년기념교회 교역자들은 새벽 5시에 모여 묘원 경내에 쌓인 눈을 쓴다.
묘원 눈치우기는 교역자들의 주요한 일이다.

2005년 7월 10일, 교회 창립예배 때 담임목사님은 청빙을 수락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양화진 묘지기'로 규정했다. 20여년간 양화진묘원 담벼락 옆에 살면서 묘원을 뜨락 삼아 거닐고 기도하고 사색하며 그분이 품었던 묘원에 대한 애정은 분명 남다르기에, '양화진 묘지기'란 말에서 풍기는 깊고 무거운 역사적 책무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부교역자들도 종종 기도와 설교 중에 자신을 '양화진 묘지기'로 묘사한다. 그 때의 그 단어의 무게감은 담임목사님과 비교할 수 없다. 나 역시 이 곳 양화진과 전혀 별개의 삶을 살다가 영문도 모른 채 이 교회 교역자가 된 까닭에 아직 '양화진 묘지기'란 말을 실감하지 못한다.

참 희안한 것은 두 달 넘게 생소하고 낯설기만 한 이 교회 속에 여전히 낯선 이방인처럼 서성거리다가도, 새벽 살포시 쌓인 눈을 치울 때면 100여년의 선교 역사의 격랑 소리가 바람을 따라 스쳐지나가는 것을 듣게 된다는 것이다. 비록 마당쇠처럼 큰 빗자루로 눈을 써~억 써~억 쓰는 것이 내 임무일지언정, 이 순간만큼은 이 조선 땅의 목회자라는 사실이 새삼 감격스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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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의피리 2012/02/09 11:04



여호와여 주의 징벌을 당하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시편 94편 12절

아버지께서 지난 6월7일(화) 오후 3시30분 즈음, 마지막 숨을 거두셨다.
그 화요일 오후가 마지막일 줄은 몰랐다. 아무도 몰랐다.

지난 4월 27일(수), 병원 검사 결과를 누나가 통곡하며 전화해왔다. 암 말기란다.
그리고 불과 40여일인데, 그렇게나 일찍 아버지는 우리 곁을 떠나가셨다.

아산병원을 모시고 다니며 검사 받으시던 나날이 눈에 선하다.
한 달 밖에 사실 수 없다는 의사의 말이 귀에 쟁쟁하다.
집을 떠나 호스피스병동으로 옮겨 가시던 그 절망의 날이 아직 또렷이 기억난다.

목요일 입원하시자마자 아버지는 거의 잠만 주무셨다.
우라질...그 몰핀 때문이다...
3주를 거의 못주셨기에, 우리 가족은 그냥 그렇게 잠만 주무시던 아버지를 보기만 했다.
주일 밤엔 내가 아버지 곁을 지킬 차례다.
아버지의 숨 소리가 매우 거칠어졌다. 발 등이 부어 올랐다. 배가 불룩 솟아 올랐다.
그 밤을 지새우며, 펼쳐든 말씀이 시편 94편이다. 12절에 저 구절이 있었다.

월요일 아침, 억지로 아버지를 휠체어에 태워 1시간 여 병동을 돌아다녔다.
아버지는 잠든 사이사이 말을 붙이면 짧게, 그러나 흐린 목소리로 대답하셨다.
화초 가꾸기를 좋아하셔서,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곳에 아버지를 모시고 갔다.
또 주무신다.
혹시 마지막일지 몰라, 살짝 뒤로 가 사진을 찍었다.

휠체어를 밀면서 나지막하게 찬송가를 불러드렸다.
아버지께서 불쑥 한 말씀 하신다.
"예배 언제 드리냐?"
그 다음 날 아버지는 세 번에 걸쳐 기도를 받았다.
마치 그 날이 마지막이라도 되는 듯이, 
아침 점심 오후에 걸쳐 사람들이 기도하러 왔고 아버지는 물리치지 못했다.
마지막 예배에 나도 있었다. 아버지 다리를 주물러드리면서 내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간호사실에 잠시 다녀온 사이
아버지는 어머니와 목사님의 찬송 소리를 듣던 중 호흡을 멈추셨다.

그 날, 그 병원, 그 병실
아버지의 몸은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어갔다.
손이 차가워졌다. 얼굴도 차가워졌다.
어머니는 한 쪽 편에서, 나는 이 쪽 편에서 통곡하고 통곡하고 또 통곡했다.

가슴이 저려온다.
후회가 밀려온다.
잘 해드리지 못해,
살갑게 막내 아들 노릇하지 못해,
더 신앙생활을 권면하지 못해,
그 고통과 공포를 경감시키지 못해,
아버지 생명을 며칠이라도 더 연장시키지 못해,
나는 죄인이 되었다.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에 대한 댓가로
나는 주의 징벌을 받는다.

제기랄..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니...
이 슬픔 속에 징벌이 있고,
징벌을 받으며 후회의 눈물을 흘리고,
후회하며 뒤늦게 내 어리석음을 깨닫다니...
아버지를 잃고 나서야 깨닫다니...
정녕, 이 방법 밖에는 다른 길이 없었던 걸까?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부디 천국에 계셔야 해요.
하나님께 영혼을 부탁하며 숨쉴 힘을 놓으신 거 맞으시죠?
내가 아버지 마지막에 찬송 불러 드렸어야 했는데...
내가 아버지 마지막에 기도했어야 했는데...

너무 후회가 되요.
너무 후회가 되요.
내 징벌이 너무 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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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의피리 2011/06/14 17:26

이거...참... 너무 오랜만에 로긴하다보니 들어올 때마다 패스워드가 생각 안 나 애 먹는다...
우라질... 확 날려 버릴까...

요즘, 내 자신, 김종필이라는 한 사람, MBTI로 치며 INTJ, 에니어그램으로 치면 5번.
이 사람 정말 맘에 안 든다.
나 같으면 이런 사람과 친구 안 하겠다.
매사 대화를 머리로만 하려고 한다. 가슴이 안 느껴진다.
너무 재고, 너무 신중한 척 하고, 너무 시간에 얽매여있고, 너무 뭔가에 쫓기는 듯하다.
사람이 넉넉치 못하고, 안 그런 척 하면서 얼마나 말이 재미없고 많은 지 모르겠다.
가만 들어보면 죄다 변명이고 합리화같다.
말이 행동보다 훨씬 앞서는 건 기본이고, 생각해 보니 말에 무게가 없다.
말한대로 실천하는 게 별로 없다.
말만, 그것도 재미없는 설교투의 말만 떠벌리는 사람이다. 정말 친해지고 싶은 구석이 없다.
이런 자와 매일 붙어사는 게 고역이다.

지난 밤 잘 기억나지 않는 불편한 꿈 때문에 잠을 깼다. 새벽 2시 조금 넘었다.
주변에 모든 사람들이 내 속 사람을 간파한 것 같은 불안감이었다.

원하는 바, 하는 일마다 잘 안되는 이 추락의 끝이 여기까지였으면 좋겠다.
그러나 아마도 바닥없는 추락은 당분간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나란 존재를 기어이 수용하고 사랑하고 말테다.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왜?
하나님이 이런 날 사랑했단다. 날 도우신단다. 나와 대화하길 원하신단다.
가슴으로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지만, 머리로도 수없이 의심이 가지만,
믿는다. 믿고 싶다. 믿으려고 한다. 믿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니...

by 신의피리 2010/08/25 10:36
1945년 초, 본회퍼가 옥중에서 쓴 시.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가끔 나더러 말하기를

감방에서 나오는 나의 모습이

어찌나 온화하고 명랑하며 확고한지

마치 자기 성곽에서 나오는 영주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또 나에게 말하기를

감시원과 말하는 나의 모습이

어찌나 자유롭고 친절하고 분명한지

마치 내가 그들의 상전과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또 나에게 말하기를

불우한 날들을 참고 지내는 나의 모습이

어찌나 평온하게 웃으며 당당한지

마치 승리만을 아는 투사와 같다는데


남의 말의 내가 참 나인가?

아니면 나 스스로 아는 내가 참 나인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하고 그리워하며 약한 나,

목에 졸린 사람처럼 살고 싶어 몸부림치는 나,


빛과 꽃과 새소리에 주리고

친절한 말 따뜻한 말동무에 목말라 하고

석방의 날을 안타깝게 기다리다 지친 나,

친구의 신변을 염려하다 지쳤다.


이제는 기도에도 생각과 일에도 지쳐 공허하게 된 나,

지쳐 이 모든 것에 안녕이라고 말할 준비가 된 나,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나인가?

오늘은 이 사람이고 내일은 저 사람인가?

아니면 이 둘이 동시에 나인가?


남 앞에선 위선자, 자신 앞에선 비열하게 슬픔에 찬 약한 나인가?

아니면, 이미 성취된 승리 앞에서 혼란하여

퇴각하는 패잔병과 같은 것이 내안에 아직도 있단 말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의 이 적막한 질문이 나를 희롱한다.

하지만 내가 누구이든, 오 하나님, 당신은 아십니다.

나는 당신의 것임을!

---

많은 말로 나를 표현하고 싶으나,
어떤 단어도 선택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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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의피리 2010/03/16 15:16

"멋진 우연은 내가 준비되지 않았을 때보다 준비되었을 때 더 많이 일어난다"
-<다시 길을 찾다>, p121

영감이 넘치는, 환상적인 일을 만날 때가 있다.
그것은 내가 이룬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선물'이다.
다시 연출해 보려고 똑같은 과정을 반복해 보아도, 같은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것을 보면, 선물임이 분명하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은 조선 땅에 떨어진 '벼락같은 축복'이었다.
지난 겨울 TNT수련회에 부어진 은혜 역시 내 인생 최고의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간혹 설교 시간에 예상치 못한 '은혜'가 임할 때가 있다.
내가 준비한 것 이상으로 내 설교 행위는 큰 열정에 의해 위로 이끌린다.
청중도 평소와 다르게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기도에 자신의 의지를 쏟아붓는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 주에 나는 바닥으로 곤두박질 치고 만다.
내 말은 길을 잃고 헤맨다. 청중은 안개 속을 헤맨다.

이런 차이는 누가 만드는가?
물론 내가 더 많이 준비해야 한다.
더 탄탄한 자료를 확보하고, 더 깊이 묵상하고,
그 주제가 머리 속에서만이 아니라 내 마음으로 흘러 내려오도록 준비하고 또 준비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멋진 우연'이 당연히 찾아 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상에서 부단하게 준비된 삶을 사는 만큼,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사는 만큼,
그만큼 삶은 환상적인 열정에 이끌려 갈 것이 분명하다.
성령의 동역자가 되어 예상치 못한 큰 일, 감동에 넘치는 일을 할 날이 올 것이다.

(뜬금없이 김연아 얘기...^^)
김연아의 예술적 공연은,
타고난 실력 + 부단한 연습 + 실패를 통해 배우는 적극적 자세 + 좋은 코치
+ 청중의 기대와 환호 + 몰입의 즐거움 + 자신의 일을 사랑하기... 등등 모든 것이 결합된 일일 것.
매 경기마다 창조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부디 후퇴하지 않기를, 교만치 않기를, 지나치게 인기에 연연하지 않기를, 오로지 경기에만 전념하기를...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나는 매주일 설교단에 오른다. 새벽에도 종종 오른다. 이번주는 총 5번에 설교단에 올랐다.
말씀 석의를 위한 훈련, 청중에 대한 사려깊은 이해, 적용을 위한 감각,
무엇보다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대변하려는 간절함...
그리고 이런 삶으로 부름 받아 살아가는 것에 대한 즐거움....
매일 누리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by 신의피리 2009/10/29 11:23

결심을 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지금 결심을 확정하려고 글을 쓰고 있다. 요 며칠 결심을 할까 말까 망설이던 일이 있었다. 이런 서성거림이야말로 나의 주특기...ㅠ 보나마나다. 이러다 말 일이다. 그래서 성장이 느린 게다. 매번 그 모양인 게다.

블로그를 시작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지 모른다. 에이~ 될 지 안 될 지 모르지만, 일단 여기에 새겨둔다. 내 사랑하는 티엔터 블로거들이 참새들처럼 짹짹 거리며 응원해 줄 줄 믿고 결심선언문을 발표하는 바이다.

뭐 대단한 건 아니다. 나는 우리 개신교의 치명적인 결점 중 하나는 영성훈련의 부재라고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다. 예수믿고 구원받으면, 그 다음부터는? 열심히 봉사하고, 예배 참석하고, 헌금하고, 전도하면 된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라는 값비싼 복음을 너무 천박하게 여긴 우리의 몰골이 이 수준이다. 나는 이 이상을 원했다. 성장하고 싶었다. 나는 더 깊어지고 싶었다. 성숙해지고 싶었다. 그런 길이라면 어디든 마다않고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길은 보이지 않고, 나는 교회와 세상을 연결짓지 못한 채 왔다리갔다리 했을 뿐이다. 그러다가 나이만 먹었다. ㅠㅠ

사무실 빈 책상에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다시 길을 찾다
브라이언 맥클라렌, IVP  김영봉, 이동원, 신상목, 지성근, 최일도 추천!


책 제목도,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틴 성당의 한 귀팅이의 그림으로 장식된 표지도 내 시선을 끈 것은 아니다. 상단 오른쪽에 작은 글씨로 새겨진 표현은 이 책이 시리즈의 입문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IVP 영성의 보화 001

저자에 관한 정보, 책 추천을 후다닥 읽다가. 뒷표지 안 쪽에 그야말로 오랫동안 찾았던 보화같은 목록이 나열되어 있었다.

1권_ 다시 길을 찾다  _브라이언 맥클라렌
2권_ 중단 없는 기도  _로버트 벤슨
3권_ 다시 찾은 안식  _댄 알렌더
4권_ 되살리는 금식  _스콧 맥나이트
5권_ 거룩한 식사  _노라 겔러거
6권_ 끝없는 순례  _다이애나 버틀러 베스
7권_ 되찾은 절기  _조앤 키티스터
8권_ 다시 채우는 십일조  _더글래스 르블랑

내 결심은 이렇다. 앞으로 이 시리즈를 다 읽으려면 족히 3년은 걸리리라. (뭐 맘만 먹으면 2달이면 다 읽을 수도 있지만 그건 이 시리즈가 의도하는 바가 아니다.) 나는 이 시리즈를 차례로 조금씩 읽어나갈 생각이다. 그러나 단지 지성의 만족을 위해서만 읽지는 않겠다. "구원 이후의 성화"를 도모하기 위한 자기 훈련의 교재로 삼을 생각이다. 읽으면서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묻고, 멈춰서서 돌아보고, 앞질러 나아가서 미래 교회를 내다보기도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내 삶으로 체화시키도록 꼽씹으로 읽을 생각이다. 이런 읽기를 렉치오 디비나Lectio Divina라고 했겠다.  

나는 이 영성의 보화 시리즈를 조교 삼아 영성훈련에 돌입할 것이다. 자칫 길고 지루해서 더디고 무료해 보일지라도 포기하지 말자. 꾸준히 훈련에 임할 수 있기를!

by 신의피리 2009/10/06 20:43

어김없이 주일 밤이 찾아왔다. 거룩한 강단 '위'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설교를 했고, 지금은 강단 '아래'에 내려와 있다. 지금 이 시간은 힘들다. 내 입을 통해서 쏟아져 나온 '말씀의 칼 끝'이 나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마음이 편치 못하다. 그렇게도 경계했던 일을 저지르고 말았기 때문이다. '설교'를 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해서 내 불편한 감정이 묻어나 있는 오염된 말을 섞지 않겠다던 내 맹세가 깨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나는 준비된 말씀 이외의 (잔소리 같은) 말을 즉흥적으로 하지 않겠다고 오래전부터 맹세했건만, 오늘은 금지의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다.ㅠ

예배 인원의 4분의 3 이상이 지각을 한다. 설교 도중에 들락날락 하는 사람들이 여럿 된다. 조는 거야 생리적인 현상이니 그건 뭐라 할 마음이 없다. 졸지 않겠다고 사투하는 모습이 대견하기까지 하다. 허나 내 눈치를 봐가며 히히덕 거리며 떠드는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잠시 분개한 것은 내 자존심 때문인가, 아니면 거룩한 의분인가. 둘 다라고 해야겠다. 귀 기울여 들어야 할텐데, 들을 귀가 없어 보이는 젊은이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동시에 그런 상황을 개선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안타깝다.

이후에 찾아오는 마음이 어렵다. 내가 그토록 멸시하던 '나이브한 설교자'의 하나가 된 것인가? 저들이 나를 존중하지 않는 것인가? 저들로 인해 우리 공동체는 성장이 어려운 것인가? 여러 질문들이 후폭풍처럼 몰아치기 때문이다. (그게 다가 아닐 것이다. 과도한 추측은 자멸로 가는 지름길이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쓰신 <설교와 설교자>를 뜨거운 마음으로 읽었다. 내 뇌리 속에 박힌 문구가 하나 있다. 설교자들이라면 누구나 반할 만한 문구이다. "불붙는 논리",,, 설교는 탄탄한 논리의 흐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청중의 머리만이 아니라 가슴을 겨냥한 열정과 결합된 논리여야 한다. 맞는 말이다. 붙붙는 논리로서의 설교를 생산해 내지 못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내 책임이다. 성령께서 이 설교를 성도의 마음에 박아 넣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청중들의 귀를 잡아당기고, 시선을 집중시키고, 입을 벌려 말씀을 그 속에 넣어야 한다. 그 약이 한 영혼을 치유하는 것은 성령의 하시는 일이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할 때, 말씀을 귀 기울여 듣지 않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 예배에 지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설교자로서의 내 책임을 상기시킨다. 설교자로서의 내 자질과 성실성과 태도를 모질게 매질하는 바이다.

이번 주는 설교를 많이 해야 하는 주다. 화요 기도회 설교, 수요찬양예배 설교, 두 번의 새벽설교... 하나님께서 즐겨 사용하시는 도구로서의 설교자가 될 수 있겠는가!

by 신의피리 2009/10/04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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