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바람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2018/06 14

박흥식, 미완의 개혁가 마르틴 루터

박흥식 지음 이 책은 쉽고 재밌다. 한 번 잡으면 끝까지 읽게 된다. (내일 주일설교 작성해야 하는데, 이 책 읽느라 벌써 토요일 오후가 되어 버렸다. ㅠㅠ) 게다가 어렵고 까다로운 신학논쟁은 나오지 않고, 시대적 상황에서 왜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으며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흘러갔는지 객관적으로 쉽게 기술하고 있다. 루터 입문서로서 손색이 없다. 부끄럽지만 ‘루터’하면 떠오르는 게, 면죄부에 대한 ‘95개조 반박문’과 ‘독일어 성경번역’ 밖에 없었다. 이 책을 통해 루터의 개혁운동을 개괄적으로 두루 훑어보게 되었다. 동시에 그의 빛만 본 게 아니라 그늘도 볼 수 있는 것은 이 책의 장점이다. 이 책의 백미는 책의 끝, 에 요약되어 있다. 루터파 교인들은 적잖이 불편할 수도 있겠다 싶다. ‘시대의 요청에 따..

마르가레타 망누손, 내가 내일 죽는다면

마르가레타 망누손 지음 80세가 넘은 스웨덴 할머니가 자신의 죽음을 대비해서 소유한 것들을 하나씩 정리해 가는 이야기다. 스웨덴 사람들은 그것을 ‘데스클리닝’(Death Cleaning)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데스클리닝은 당신이 세상을 뜬 후 자식을 비롯한 사랑하는 사람들이 당신의 물건을 처리해야 하는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일종의 배려입니다. ... 데스클리닝은 즐거운 놀이로써 이를 통해 물건의 의미를 찾고 추억에 젖는 것이 핵심입니다.”(182p) 얼마전 우리교회 교우님의 한 가족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72년생, 나와 동갑이란다. 젊다. 아직 인생 정점을 찍지 않은 나이일텐데, 나랑 동갑이란 말에 무척 그 가족이 안쓰럽다. 어느날 홀연히 찾아올 죽음, 그 죽음이 사랑하는 이들에게 배려와 사랑으..

박완서, 한 말씀만 하소서

"... 신, 당신의 존재의 가장 참을 수 없음은 그 대답 없음이다. 한 번도 목소리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도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을 있는 것처럼 느끼고, 부르고, 매달리게 하는 그 이상하고 음흉한 힘이다. ...” (박완서, p.82) 박완서의 쓰라린 일기를 읽다 이 문장에서 멈칫거린다. 나는 언제나 말귀를 못 알아먹는 내 귀와 마음을 탓했지, 말없이도 우리를 굴복시키는 하나님을 비난하진 않았다. 그분은 늘 말씀하셨건만 듣지 못하는 건 나였다. 듣고 싶어 갈망했지만 말하지 않는다고 그분을 욕하진 않았다. 신의 대답을 듣고 싶은 열망도 없고, 못 듣는다고 아우성치지도 않고, 그저 존재하는 걸 당연히 여기나 정작 존재하시는 분을 존중하지도 않는 삶. 아들 잃은 어미의 절규가 회칠한 무덤 같은 종교인보다 훨..

히브리 민중사(문익환)

문익환, 91년 스무 살, 파릇파릇 한 대학 신입생 때, 교회 교구담당 전도사님이 슬쩍 책 한권을 내밀었다. 단숨에 책을 읽었지만 거부감이 컸다. 나를 형성한 내 영성과 ‘달랐기’ 때문이다. 27년 만에 다시 다른 출판사에서 복간된 문익환 목사님의 책을 읽었다. 마침 오늘이 문 목사님 탄생 100주년이란다. ‘히브리’는 ‘하비루’에서 파생된 단어로, 고대 근동의 노예나 용병을 지칭했다고 한다. 출애굽은 ‘하비루’들의 해방전쟁이다. 가나안 정복은 가나안의 ‘농민’들과 ‘하비루’들이 합세하여 전쟁의 신 ‘야훼’의 이름으로 싸운 민중들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전쟁이다. 아브라함-모세-갈렙-다윗-엘리야-아모스-예레미야 등으로 이어지는 하비루 전통. 궁중사가들에 의해 희석된 구약을 민중사의 관점으로 다시 푼 문 목..

습관이 영성이다(제임스 K.A.스미스)

습관이 영성이다 요즘 제임스 스미스가 화제인가 보다. 해서 가장 쉬워 보이는 책부터 골라봤다. 논점을 놓치지 않으려고 손가락을 짚어가며 읽다보니 이런 문장이 나온다.“따라서 나라가 임하길 기도하셨던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뤄진 예배 공동체를 특징지어야 할 문화적 실천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몸은 계속해서 노력해 왔다.” (p.128)뭐래는 거야? (똑똑한 나의 벗들, 성호나 준재가 원문 비교 하여 해설해주길 바란다.) 암튼 읽어야 할 책이 많은데 이렇게 쉽게 해독이 안 되는 문장들을 읽어야 할 땐 참 골치 아프다.제임스 스미스의 주장은 그리 신선한 것은 아니다. ‘내가 아는 것이 나’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고 갈망하는 것이 나’라는 주장은 개혁주의 신학 밖에서는 오래전부터 논의되어..

공동체

21교구 소식지 마지막호. 2015/12/13 교구소식지 마지막호, ‘공동체’ 지난 여름 지리산 종주를 하다가 불현 듯 ‘교구소식지’가 떠올랐다.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연결’에 대한 갈망이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고 싶은 욕구가 있다. 타인의 얼굴에서 나와의 공통점을 찾고, 그래서 안전을 느끼고 힘을 얻고 싶어 한다. 그 연결망을 설치하여 서로서로 잇대게 하고 싶은 마음이 첫 번째 이유였다. 두 번째는 ‘공동체’에 대한 갈망이다. 실은 이것은 첫 번째 갈망이 실현된 결론일 것이다. 다들 외딴섬처럼 따로따로 각자 자신만의 마을을 이루고 있는 12개의 구역이 실은 하나의 공동체였음을 어떻게 경험하게 할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으로 ‘교구소식지’가 발행되었다. 세 번째는 내 자신의 정체성에..

기고/양화진 2018.06.08

K에게

21교구 소식지 9호. 2015/12/06 K에게 K! 파르르 떨리는 입술, 그렁그렁한 네 눈물이 잊혀지지 않는구나. 얼마나 마음 아팠으면 꾹꾹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흐를까. 꼬옥 안아주고 싶었다만, 그러질 못해 내내 미안했구나. 생각해보니 나도 네 나이 때쯤이 인생 중 제일 아픈 순간이었지 싶다. 타인에게 내 진심 가 닿지 않고, 내 앞에 놓인 길의 방향은 흐릿하기만 하며, 서 있는 내 품세는 어정쩡하기만 하니, 그저 내 신세 처량하기만 했었지. 하나님께 젊음 바쳐 애써온 것의 대가가 이런 것인가 싶어 하소연만 나왔었고. 내 몰골이 이런데 내가 무슨 사람 섬긴다고 앞에 서 있을까 하는 자격지심만 한없이 커졌었지. 그래, 그래서 멋지게 잠적하고 싶은 충동이 참 많이 일어났었구나. K! 네가 네 자신을 평..

기고/양화진 2018.06.08

비교의식 내려놓기

21교구 소식지 7호. 2015/11/08 비교의식 내려놓기 내 내면에 ‘비교의식’이라는 것이 언제 처음 태동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나보다 키가 한 뼘은 더 크고 좌우로 가늘게 찢어진 눈에 광대뼈가 심하게 튀어나온 ‘진표’라는 친구에게 은근한 열패감을 느끼곤 했었다. 목소리 큰 진표의 기세에 눌려 지내던 나는 어느날 그 친구를 바닥에 눕히고서는 배 위에 올라타 양 팔을 무릎으로 누르며 ‘항복해!’라며 소리 지른 기억이 있다. 내 힘이 더 셌고, 나는 승리감으로 우쭐거렸다. 그렇지만 내 인생 중에 그렇게 우쭐거린 순간은 많지 않았다. 움츠러든 순간이 백배는 더 많을 것이다. 매사 우월감의 순간을 지향했지만 대개는 열등감에 빠져 허우적대기 일쑤였다. 내면의 전쟁이 다 끝난 듯 보였던 신..

기고/양화진 2018.06.08

복면가왕

21교구 소식지 4호. 2015/10/18 복면가왕 집에 TV 없이 산 지 17년째다. 결혼할 때 아내와 TV 없이 신혼 1년을 살아보자고 결심한 게 벌써 17년이 되었다. 지금이야 종종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세상에 들락날락 하니 심심할 날이 없지만, 신혼 초엔 어찌 지냈나 모르겠다. 어쨌든 목표는 이랬다. 소중한 저녁 시간에 TV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대신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는 게 우리의 바램이었다. 그 선택을 한 번도 후회해 본적이 없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종종 TV 타령을 한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테블릿 PC를 통해 일주일에 딱 한 번 온가족이 모여 ‘개그콘서트’를 본다. 아이들이 하도 하소연을 하다 보니, 시청하는 프로그램이 서너개 더 늘었다. 아이들은 ‘런닝맨’, ‘무한도전’을 ..

기고/양화진 2018.06.08

그분의 자리, 그분의 마음

그분의 자리, 그분의 마음김종필 100주년기념교회 목사 어느 해 겨울 2박 3일의 피정(避靜)을 맞아 강원도 산골짜기에 있는 를 방문했다. 은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 도시인들이 침묵과 노동 속에서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기에 좋은 곳이다. 많은 이들의 오랜 기도가 흰 눈과 더불어 수북이 쌓여 있었던 까닭인 지, 예수원의 뜰을 밟는 것만으로도 세속의 때가 말끔히 씻기는 듯한 기분이었다. 삐걱대는 마룻바닥에 방석을 깔고 살포시 무릎을 꿇으면 침묵을 깨는 순명(順命)의 기도가 흘러나오고, 성경을 펼치면 주목하는 활자마다 마치 돋보기를 통해 보이듯 또렷하고 굵은 문자로 도드라지게 보인다. 추위에 얼어붙은 딱딱한 산길을 따라 오롯이 걷다 보니 성령님께서 중요한 미션을 막 귀띔해 주실 것 같은 거룩한 신비감에 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