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바람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세미한 소리를 듣다

등불 성경

신의피리 2015. 3. 18. 16:46

등불 성경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주님의 은총이었다. 내가 걸어온 길이 그저 우연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듯보이나, 실상 주님의 '섭리'로밖에 해석이 안되는 경우가 참 많다. 그래서 지금도, 앞으로도 주님께서 그리 인도해 가시리라 믿게 된다. 

 

얼마전 '양화진청년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말씀과 동행하는 삶'이라는 주제도 정해져 있었다. 얼떨결에 강의 수락은 했지만, 막상 어떤 내용을 전해야 할 지 조금 막막했다. 

 

2박3일 간 강원도 태백에 있는 예수원으로 피정을 다녀왔다. 그곳에서 내가 주력했던 것 중에 하나는 양화진청년학교 강의 내용이다. '말씀묵상'으로는 처음 강의를 해 본다. 늘상 하는 거라 쉽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의외로 사람들은 말씀묵상을 잘 안한다. 하려고 해도 그게 뭔지 잘 모르고, 그 즐거움도 잘 모른다. 왜 그런가? 말씀의 홍수 속에서 왜 말씀묵상은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일까? 

가장 좋은 묵상의 대상은 바로 '나'다. 내 자신을 돌아보면, 내 내면을 살펴보면 바로 답이 나온다. 내 경우가 보편적인 경우이다. 

 

성령님께 또다시 SOS를 치며 지혜를 구한다. 그 때 번뜩이는 생각이 스친다. 시편 119편이다. 119편을 찬찬히 읽어본다. 105절에 시선이 멈춘다. 실은 한 달여 전에도 이 말씀이 잠시 내 머리 속에 머물다가 간 적이 있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내 한 걸음 앞을 비춰주는 말씀. 내 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말씀. 컴컴한 밤에 산책을 나가 가로등 밑에 서서 등과 말씀의 공통점을 생각해 보았다. 

- 말씀과 등불은 바로 한 걸음 앞을 비춰준다.

- 말씀과 등불은 어두움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기괴한 소리로부터 용기를 준다.

- 말씀과 등불은 어둠과 빛의 경계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렇지만 이 사실이 곧 내 강의의 '컨텐츠'가 될 수 있는가? 그냥 막연한 지침 아닌가? 여전히 남은 의문을 품은 채 2박3일을 보내고, 이제 하산을 한다. 반납했던 휴대폰을 받아서 전원을 켜니 문자가 우두두 쏟아진다. 그 중, 교회 앞 홍성사책방에서 일하는 청년의 문제가 의아하다. 서점에 교회 어떤 권사님이 맡겨놓은 게 있다고 와서 찾아가라는 것이다. 피정을 마치고 서점에 들려 내 앞으로 전달된 큰 포장지를 가져와 사무실에서 펼펴 보았다. 

 

"등불성경" 

 

2박3일간 '등불성경'을 묵상했고, 내내 시편 119편 105절이 내 마음을 맴돌았다. 그랬더니 이번엔 아예 '등불성경'이 턱하니 내 앞으로 배달되었다. 우연이지만, 나는 우연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메시지이다. 

 

맞다. 말씀을 붙들고 생각하자니, 할 이야기가 마구 쏟아져 나온다. 말씀이 등불이 되었던 경험이 쏟아져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신뢰하지 못하고 자기 이익을 위해 말씀을 이용해 먹는 현대 기독교인들의 어리석음도 떠오른다. 

 

양화진청녕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청년들이 얼마나 도움을 받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치만 나는 엄청 큰 도전을 받았다.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네 삶에 찾아와 가야 할 바를 보여주고, 용기를 주며, 죄와 유혹와 악을 물리칠 지혜를 준다는 사실에 이토록 확신을 못갖고 있었다니. 새삼 내 영적 아둔함이 의아할 뿐이다. 

 

평생토록 이 말씀을 마음에 아로새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편 119편 105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