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바람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기고/양화진

아픈 바람

신의피리 2014. 9. 5. 11:12
<100주년기념교회 100통> 기고

아픈 바람

1995년, 군대에서 막 제대한 저는 중고 자전거를 하나 구입해서 ‘다크호스’라고 이름 붙이고는 밤마다 운동 삼아 타고 나가곤 했습니다. 어느 밤, 한강 다리 중간에 자전거를 멈춰 세우고 불어오는 강바람과 오래 마주 선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제 귓가를 스쳐가는 노랫말이 하나 있었습니다.

홍순관, <어떤 바람>

바람은 보이진 않지만
나무에 불면 녹색바람이
꽃에 불면 꽃바람 되고요
바람은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방금 나를 지나간 그 강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그 바람에 이름을 붙인다면 어떤 이름이 될까? 몇 가지 작명을 시도해 보았지요. 녹색바람, 꽃바람 같은 낭만적 이름은 아니었습니다. 되레 칙칙한 바람, 우유부단한 바람, 무색무취의 바람, 외로운 바람, 비겁한 바람... 제 병든 마음속을 헤집다가 사라진 ‘아픈 바람’이 더 잘 어울렸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습관이 하나 생겼습니다. 제 영혼을 스쳐 지나간 ‘아픈 바람’의 여운을 붙들고, 내게 남겨진 ‘불편한 마음’을 헤아려 보는 것이었지요. 그냥 내버려두면 또 아플 것 같았습니다. 그 바람은 어디서 불어온 걸까, 어떤 강도로 휩쓸고 지나갔는가, 왜 나는 그 바람을 피하지 못했을까, 하나님 앞에 탄식하던 시편의 시인처럼 기도와 탄식이 뒤섞인 일기를 기록하는 습관이 시작된 것입니다. 유능한 친구들의 진학과 취업 소식을 들으면 강풍이 붑니다. 공동체 안에서 외로움이 찾아오면 쓸쓸한 바람이 지나갑니다. 부모님으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들으면 허리케인이 휩쓸고 지나갑니다. 말에 실수가 생기고, 책임을 제대로 못 지고,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자신에게 실망감이 쌓이면 사방팔방에서 아픈 바람이 불어오고 스쳐갑니다.

마음이 불편해 진 건, 분명 어떤 바람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그 바람이 무섭고 미웠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니, 대개의 바람은 성령님의 흔적인 경우가 참 많았습니다. 순결의 바람이 내 안에 불어오니, 더러운 제 영혼이 아픈 거지요. 촉촉한 단비를 몰고 성령님이 지나가시니, 가물어 메마른 땅이 이질감을 느껴 저항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불편한 마음’은 바람이신 성령님께서 지나가시며 게으르고 이기적인 우리를 흔들어 깨우기 위한 흔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봄 고난주간부터 불기 시작한 세월호의 바람이 아직도 후폭풍처럼 제 영혼을 흔들고 있습니다. 허위와 가면을 날려버리고 흉측한 시대의 민낯을, 욕망으로 치닫는 교회의 생얼을, 그리고 용기 없는 무색무취의 제 자신을 고스란히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크고 작은 바람이 어제도 오늘도 제 영혼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불편하고 아픕니다. 그렇지만 거기서 성령님의 흔적을 찾습니다. 그러면 아픈 바람이 실은 치유의 바람이었음을 알게 되겠지요.